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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매니멀(Manimal)에 대하여

by verleugnung 2020. 8. 29.

www.youtube.com/watch?v=p_ENdyEJO_Q

 

# 영상에서는 게임들에서 등장하는 '소름끼치는' 버그들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42초부터 등장하는 <레드 데드 리뎀션>의 버그가 인상 깊었다.

#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버그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인간 npc와 동물 npc가 서로 혼합되어 버린다. 우리가 굳이 질료와 형식을 구분한다면, 여기서는 동물의 형식 속에 인간의 질료가 담긴 것 같은 모양새가 나타난다. 이 '혼합물(영어로는 Manimal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은 시각적으로 인간의 질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이 프로그래밍 된 방식, 그것이 담겨진 틀은 동물의 그것을 따른다. 이것들은 두 팔을 펄릭이며 하늘을 날거나, 온 몸을 배배꼬며 뱀처럼 기어가거나, 멧돼지처럼 초원을 달리며 인간을 향해 달려든다.

# 지젝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상징계를 벗어난 실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세계는 언어 등으로 철저하게 상징화돼있고 우리는 그러한 상징에 입각해 세계를 살지만, 그런 상징들의 사이 사이에서는 상징화를 거부하는 것들이 스멀스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우리를 위협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욕망을 억압하고 거세당하지만, 그렇게 억압된 것은 언제나 괴물의 형상을 하고 우리에게 회귀한다.

# 그런데 이런 관점은 어딘가 소극적인 데가 있다. 라깡 식의 관점이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데는 탁월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자연'을 기술하는데는 분명 모자라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여기서 Manimal은 Man을 모사하는 Animal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Manimal은 동시에 Animan일 수도 있다. Man과 Animal은 유사성의 원칙을 따르기보다는 유비의 관계를 맺는다. 둘 사이에서는 어떠한 참조점도 없다. 레드 데드 리뎀션이라는 게임 속에서 Man과 Animal이 공통분모로 갖는 유일한 참조점은 바로 게임 속의 배경 즉 세계 자체다.

# Man이나 Animal은 모두 세계 속에서 나와 세계 속으로 돌아간다. Man이나 Animal은 이 세계의 표현물들일 뿐이다. 그래서 Man이나 Animal은 모두 세계의 한 측면을 표현하는 어떤 것이 된다. 

# Man과 Animal 사이에서 서로에게 환원되지 않는 괴물이, Manimal 따위가 나타나는 이유도 정확히 거기에 있다. Man은 Animal을 의태할 수 있고, Animal 또한 Man을 의태할 수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인간도 동물도 아닌 중간자적인 존재자가 드러난다. 마치 영화 <미믹>에서의 바퀴벌레 인간처럼 말이다. 

# 그런데 이런 중간자적인 존재는 오히려 우리의 세계와 자연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 아닌가? 다윈이 이야기한 <자연선택>은 자연의 일방적인 압력 속에 놓인 동물의 '수동적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연은 생물체를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생물과 상호작용한다. 그런 과정에서 생물체가 변하고, 동시에 그러한 생물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 자체도 변한다.

# <서던리치 : 소멸의 땅>같은 영화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영화 속 '쉬머'라는 공간 안에서 생물체들은 서로 뒤섞이기 시작한다. 거기에서는 자연의 '압력에 굴복해' 도태되거나, 사라지거나, 새로 탄생하는 생물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생명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은 '생식'이라는 고리타분한 수단을 필연적으로 경유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를 '의태'한다. 단순히 의태하는 방식만으로도 인간은 나뭇가지를 닮아가고, 나뭇가지는 인간을 닮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 속에서 생물과, 사물과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그 자체로 세계를 구성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시도때도 없이 다른 생명체와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에 있어서만 국소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말하자면 <레드 데드 리뎀션>에서는 왜 Manimal이 나타날 뿐, ManTree나 ManRiver, ManTrain 같은 건 나타나지 않는 걸까?

# 이전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으며 읽었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여기서 플라톤은 신을 '목수'에 비유한다. 즉 여기서 신은 나무를 만들고, 그런 나무를 가공할 인간을 만들고, 또 거기서 인간은 마치 신을 '모사한' 상태에서 가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신은 그 자신 조차도 나무, 인간, 가구 사이에서 어떠한 위계적인 독점권도 가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이러한 신이 '나무의 결에 따라 가구를 만드는 목수'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 '결을 따른다'는 비유가 상당히 탁월한데, 신은 마치 목수가 그러하듯이, 결에 역행하여 창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신에 대조되는 '자연의 우월함' 같은 것이 나타나는 것만 같다. 자연에는 결이 있다. 

# 우리가 '무턱대고 서로 뒤섞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것은 '유비analogie'라고 불려질 수 있다. <레드 데드 리뎀션>에서 인간의 양팔은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와, 팔다리는 멧돼지의 네다리와, 목-가슴-다리로 연결된 '몸통'은 뱀의 몸통과 유비적이다. 인간의 팔과 새의 날개는 '상동기관(계통적으로 동일한 기원을 가짐)'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뱀이 될 수 있는가? 게다가 버그 속에서 인간의 양팔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게임의 '프로그램 코드'는 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을 구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의 구별을 넘어서는, 진화적 역사같은 '코드화'를 넘어서는 '의태'와 '닮음' 밑 '유비'의 관계가 분명 있다.

# 여기서 우리가 정신분석학의 '동일시'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적인 '동일시' 개념은 우리를 심리학적 체계 속에 묶어둠으로써 우리의 사유를 제한한다. 우리는 정말 단지 '아버지'라는 인물을 닮아가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아버지가 입었던 양복에, 아버지가 썼던 고풍스러운 안경에, 아버지의 목소리에,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에 우리 스스로를 의태시키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설명 : <레드 데드 리뎀션> 2편에서 제작진들은 이 기념비적인 Manimal의 존재를 회고하고 기념하고자 한 버려진 오두막 앞에 당나귀의 두개골과 꼬리를 가진 한 여성 '생물체'의 시체를 걸어놨다고 한다

# 영상에서는 게임들에서 등장하는 '소름끼치는' 버그들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42초부터 등장하는 <레드 데드 리뎀션>의 버그가 인상 깊었다.

#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버그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인간 npc와 동물 npc가 서로 혼합되어 버린다. 우리가 굳이 질료와 형식을 구분한다면, 여기서는 동물의 형식 속에 인간의 질료가 담긴 것 같은 모양새가 나타난다. 이 '혼합물(영어로는 Manimal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은 시각적으로 인간의 질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이 프로그래밍 된 방식, 그것이 담겨진 틀은 동물의 그것을 따른다. 이것들은 두 팔을 펄릭이며 하늘을 날거나, 온 몸을 배배꼬며 뱀처럼 기어가거나, 멧돼지처럼 초원을 달리며 인간을 향해 달려든다.

# 지젝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상징계를 벗어난 실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세계는 언어 등으로 철저하게 상징화돼있고 우리는 그러한 상징에 입각해 세계를 살지만, 그런 상징들의 사이 사이에서는 상징화를 거부하는 것들이 스멀스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우리를 위협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욕망을 억압하고 거세당하지만, 그렇게 억압된 것은 언제나 괴물의 형상을 하고 우리에게 회귀한다.

# 그런데 이런 관점은 어딘가 소극적인 데가 있다. 라깡 식의 관점이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데는 탁월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자연'을 기술하는데는 분명 모자라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여기서 Manimal은 Man을 모사하는 Animal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Manimal은 동시에 Animan일 수도 있다. Man과 Animal은 유사성의 원칙을 따르기보다는 유비의 관계를 맺는다. 둘 사이에서는 어떠한 참조점도 없다. 레드 데드 리뎀션이라는 게임 속에서 Man과 Animal이 공통분모로 갖는 유일한 참조점은 바로 게임 속의 배경 즉 세계 자체다.

# Man이나 Animal은 이 세계의 표현물들일 뿐이다. 그래서 Man이나 Animal은 모두 세계의 한 측면을 표현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 게임 자체에만 국한해서, 조금 비약시켜서 말해보자면, 이 게임 속에서 세계라 함은 '코딩된 프로그래밍 언어'다. 인간 npc와 동물 npc는 모두 그러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질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버그란 쉽게 말해 프로그래밍 언어가 일방향적 대응관계에서 벗어나 변칙을 택하면서, 인간을 표현하려던 언어가 동물을 표현하게 되고, 동물을 표현하려던 언어가 인간을 표현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세계는 고정된 방향을 향해 목적성을 가지고 표현되지 않는다. 

# 여기서 어떤 예기치 못한 사태들이 벌어나는 것이 굉장히 재밌는데, (내가 프로그래밍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게임에는 'A라는 개체가 B라는 개체에게 달려가 공격을 한다'라는 하나의 사건이나 사태가 '프로그래밍화'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상호작용'이나 '역동' 같은 것이 프로그래밍 언어로서 기입되어 있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언어'들이 수많은 상호 참조와 위계를 가진 상황에서 주욱 나열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간단한 프로그램 혹은 고전적 프로그램이야 나열된 코드들의 개수 자체가 적으니 위계가 흐트러질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게임 처럼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가진 게임들의 경우, 이런 위계들이 흐트러지면서 이쪽 코드가 저쪽 코드와만 호응해야 하는데 실수로 엉뚱한 코드들과 호응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A가 B를 공격하되 이 A라는 코드 안에 동물의 질적 특성이 부여되어 결국 멧돼지가 인간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져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인간이 멧돼지의 특성을 안고 인간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 이런 뒤섞임의 사태 속에서 Man과 Animal 사이에 서로에게 환원되지 않는 괴물이, Manimal 따위가 나타나게 된다. Man은 Animal을 의태할 수 있고, Animal 또한 Man을 의태할 수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인간도 동물도 아닌 중간자적인 존재자가 드러난다. 마치 영화 <미믹>에서의 바퀴벌레 인간처럼 말이다. 

# 그런데 이런 중간자적인 존재는 오히려 우리의 세계와 자연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 아닌가? 다윈이 이야기한 <자연선택>은 자연의 일방적인 압력 속에 놓인 동물의 '수동적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연은 생물체를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생물과 상호작용한다. 그런 과정에서 생물체가 변하고, 동시에 그러한 생물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 자체도 변한다.

# <서던리치 : 소멸의 땅>같은 영화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영화 속 '쉬머'라는 공간 안에서 생물체들은 서로 뒤섞이기 시작한다. 거기에서는 자연의 '압력에 굴복해' 도태되거나, 사라지거나, 새로 탄생하는 생물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생명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은 '생식'이라는 고리타분한 수단을 필연적으로 경유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를 '의태'한다. 단순히 의태하는 방식만으로도 인간은 나뭇가지를 닮아가고, 나뭇가지는 인간을 닮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 속에서 생물과, 사물과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그 자체로 세계를 구성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시도때도 없이 다른 생명체와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에 있어서만 국소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말하자면 <레드 데드 리뎀션>에서는 왜 Manimal이 나타날 뿐, ManTree나 ManRiver, ManTrain 같은 건 나타나지 않는 걸까?

# 이전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으며 읽었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여기서 플라톤은 신을 '목수'에 비유한다. 즉 여기서 신은 나무를 만들고, 그런 나무를 가공할 인간을 만들고, 또 거기서 인간은 마치 신을 '모사한' 상태에서 가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신은 그 자신 조차도 나무, 인간, 가구 사이에서 어떠한 위계적인 독점권도 가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이러한 신이 '나무의 결에 따라 가구를 만드는 목수'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 '결을 따른다'는 비유가 상당히 탁월한데, 신은 마치 목수가 그러하듯이, 결에 역행하여 창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신에 대조되는 '자연의 우월함' 같은 것이 나타나는 것만 같다. 자연에는 결이 있다. 

# 우리가 '무턱대고 서로 뒤섞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것은 '유비analogie'라고 불려질 수 있다. <레드 데드 리뎀션>에서 인간의 양팔은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와, 팔다리는 멧돼지의 네다리와, 목-가슴-다리로 연결된 '몸통'은 뱀의 몸통과 유비적이다. 인간의 팔과 새의 날개는 '상동기관(계통적으로 동일한 기원을 가짐)'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뱀이 될 수 있는가? 게다가 버그 속에서 인간의 양팔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게임의 '프로그램 코드'는 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을 구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의 구별을 넘어서는, 진화적 역사같은 '코드화'를 넘어서는 '의태'와 '닮음' 밑 '유비'의 관계가 분명 있다.

# 여기서 우리가 정신분석학의 '동일시'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적인 '동일시' 개념은 우리를 심리학적 체계 속에 묶어둠으로써 우리의 사유를 제한한다. 우리는 정말 단지 '아버지'라는 인물을 닮아가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아버지가 입었던 양복에, 아버지가 썼던 고풍스러운 안경에, 아버지의 목소리에,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에 우리 스스로를 의태시키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설명 : <레드 데드 리뎀션> 2편에서 제작진들은 이 기념비적인 Manimal의 존재를 회고하고 기념하고자 한 버려진 오두막 앞에 당나귀의 두개골과 꼬리를 가진 한 여성 '생물체'의 시체를 걸어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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