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 자신이나 배우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미워하는 겁니다.>
요즘 우울증을 앓는 중년 남성들이 부쩍 늘었다. 그들은 부부싸움이 늘었다고, 자녀들이 자신을 업신여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무가치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도 한다. 여기까지는 본인 이야기다. 배우자와 자녀들은 그가 직장을 잃은 뒤부터 점차 우울해진 것 같다면서, 아마도 시작은 올해 3월부터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정신분석학의 분석 대상은 필연적으로 집단과 사회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월요일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우울한 이유는 배우자 때문도, 자녀 때문도 아니고, 당신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때문도 아니다. 모든 것의 배경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 여파로 인한 실직이, 노동자라는 당신의 계급의 불안정성이 있다.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이 경험하는 우울증과 서울의 직장인이 경험하는 그것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기독교 정신이 팽배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히스테리 환자가 현대의 환자들과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을까. 19세기에나 21세기에나 우리의 뇌는 여전히 동일한 신경전달물질을 주고받고 있지만, 우리 개인이 놓인 맥락은 언제나 다르다.
영국의 초기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생산자들과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생산자들 사이에서 임금이라는 가변자본을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작동하면서 결국 자본주의를 유지시켜주는 노예의 운명 속에 놓여 있었다면, 한국의 노동자가 한국의 자본주의적 체제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배치들, 그러한 배치들로 인해 겪을 수 밖에 없는 운명과 경로들이랄 게 있을 것이다. 백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 있는 아들의 운명을 분석해봐야, 자본주의의 기계들 사이에 끼어 있는 노동자의 우울증은 밝혀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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