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에게는 세 가지 레벨이 있다.
첫째 : object. -> object는 closed system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 : movement
셋째 : the whole = duration
영화로 치자면
첫째 : cineme (영화소) -> 이것들이 쇼트 안에 배치된다. 이 배치는 그 자체로 framing이며, closed system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 : shot -> 이 안에서 운동이 나타난다.
셋째 : 영화 자체 -> 쇼트와 쇼트들이 호응하는 과정에서 duration이 나타난다.
여기서 (내 생각에) 셋째 레벨을 미분하면 둘째 레벨, 둘째 레벨을 미분하면 첫째 레벨이 나온다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duration은 하나인가? 여럿인 것 같다. 그래서 sub-duration이라는 표현을 쓰는 듯 하다. 인간의 duration이, 새의 duration이 있다.
movement는 object와 the whole 사이를 매개한다. 그러나 이 매개가 부정변증법적인 것은 아니다.
movement는 object가 the whole 속에 기입될 수 있고, 또 반대로 the whole이 object를 통해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the whole은 스피노자의 신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표현이 있고, 표현된 양태들이 object이다.
the whole은 열려있다. 그것은 절대로 그 전체로서 giveable 하지 않다.
에이젠슈타인은 쇼트(쇼트는 컷과 컷 사이의 시간 간격을 말한다)와 쇼트가 부정에 의해 충돌함으로써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들뢰즈도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부정에 입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과학과 자신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전자를 quantity에 기반한 것으로, 후자를 quality에 기반한 것으로 정의하는 듯하다.
쇼트와 쇼트가 호응하는 게 중요하다. 초현실주의 영화에서는 unusual objects들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만, 그것들은 다른 쇼트들과 소통하지 못함.
그는 세 가지 종류의 시네마 기법을 비교한다.
첫째는 소비에트 몽타주 식. 즉 부정변증법에 의한 것.
둘째는 프랑스 사조 중 Gance, Gremillon 같은 사람들. 이들은 quantitative한 기법을 쓴다. 한 장면 안에 최대한 양적으로 많은 요소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그것들이 충돌해 whole을 이루게 만든다. (예 : https://www.youtube.com/watch?v=aGn4_DTFFlc)
셋째는 베르그송식 관점. 이것은 quantitative한 것이 아니라 intensive한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영화가 duration을 표현하는 가운데 왜 지속적으로 decomposition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하다가 강의를 끝낸다. 내 생각에, duration은 죽음본능과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decomposition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영화 탐욕 : https://cafe.naver.com/ies1455/25171
-> 모든 쇼트가 캐릭터의 duration에 연결된 영화
영화 잃어버린 주말 : https://tv.naver.com/v/9851243
-> decomposition을 보여주는 영화
이미지의 정의에 대해
들뢰즈는 여러 가지 종류의 '이미지image'가 있다고 보는데, 여기서 '쇼트'는 '운동-이미지'에 속한다.
세 가지 image가 있다고도 함. 즉 세가지 레벨 각각이 image라고 보는 듯하다.
"Remember, the three levels of the image are, again, objects taken in sets, that is, in artificially closed systems; [Pause] the Whole, on the other hand, [is] at the other end, as duration, as change, as perturbation, since the Whole can only be defined as a function of these perturbations."
한편 그는 '시네마 이미지'라는 말도 쓴다. 사유 이미지 처럼 시네마 이미지가 있다고 보는 듯.
그리고 시네마 이미지에 세 가지 측면(aspect)이 있다고도 말하면서, 이 세 가지 측면을 위에서 말한 세 가지 level에 대응시킨다. 또 세 가지 이미지 레벨이 있다는 말도 함.
이미지에 관한 글 : https://blog.naver.com/haley0427/221111097027
일반적인 통념으로, 이미지는 본질이나 실재와 대립하는 것, 본질을 가려서 착각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참고하여 이미지의 개념에 새로운 부여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관념론자와 유물론자가 주장하는 바의 대립은 허구적일 결국 둘 다 표상(idea, image)이 정신 속에 있고, 세계는 그 바깥에 있다는 것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입장 모두 표상과 세계가 부합하는가의 회의에 시달린다. 베 이 전제 자체를 비판하며, 그런 식으로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기 전에 위치한 것이 이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세계에 있는 것이고, 이미지는 그 자체로 세계라는 것이 이미지는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물론자(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는 덜한, 표상과 사물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베르그손의 이미지론에 입각해서 자신의 영화 이론을 펼친다. 그는 사물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한 겹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미 재의 위계를 없앤다. 세계는 이미 한 편의 cinema, 즉 앞으로 만들어질 모든 영화의 담고 있는 총체(meta-cinema)이다. 모든 만물은 상호 변용을 일으키는데, 우리는 그 포착하지는 않고 필요한 것만 잘라서 가진다. 그것이 이미지이다. 사람 뿐 아니라 동 무생물도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이미지 개념이 영화에 의해, 사물의 서 세계가 어떻게 보이는 지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현실화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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