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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Baby in car'에 대한 항변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11. 23.
 
예전부터 우리 부부는 차 뒤에 붙여진 ‘Baby in car’ 같은 문구를 볼 때마다 불쾌감을 토로해왔다. 물론 얼마 전 아기가 생기고 나서는 어느 정도 저런 걸 붙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저 문구에 대해 어떤 정당성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가끔 아내가 묻기도 했다. ‘근데 말이지, 저건 꼭 자기 애 중요하니까 비키라는 의미로 붙인 게 아니라, 나중에 사고가 나면 애를 먼저 구출해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하니까 우리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렇게 생각해보려고도 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논거는 정당함을 변호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맞춘 그런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저런 논거를 납득하지 않는가 생각을 좀 해봤다. 몇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하다.

 

1. 해당 문구의 ‘배치’와 관련해.

 

알다시피 이런 문구는 항상 차의 뒤편 왼쪽 유리창에 붙어있다. 근데 왜 항상 그 위치에 붙어있는 걸까? 꼭 거기에 붙어야만 하나? 사실 생각해보면 사고가 났을 때 저 문구가 더 잘 보일 수 있는 위치는 다른 데도 많은 것 같다. 가령 차의 몸체라든지, 옆면이라든지 등등. 근데도 굳이 저 위치를 계속해서 고수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저 문구의 가정된 ‘수신자’는 누굴까? ‘주로’ 누가 보라고 저걸 붙여놓는 걸까? 소방수 아저씨들? 근데 소방수 아저씨들이 볼 것이라면 굳이 저 왼쪽 뒤에 달아놓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저 문구를 직빵으로 대면하게 되는, 가장 가깝게 보는 사람은 누군가? 바로 뒤에서, 왼쪽편의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고 있는 운전자가 아닌가? 그래도 저 문구가 가정하고 있는 주 ‘수신자’가 소방수라고 주장할텐가?

 

게다가 문장, 특히 어떤 상징적 신호로서의 문장 같은 것은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가령 ‘잠깐만!’이라는 푯말이 있다고 해보자. 이게 자동차 도로 중 주택가에 설치된 경우 그것은 행인이나 개를, 혹은 방지턱을 조심하라는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에 붙어있어도 같은 의미를 띨까? 사실 남자 화장실에 붙어진 ‘잠깐만!’이라는 신호는 그것의 기의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가위 모양의 이모티콘’과 거의 동등한 의미를 지닌다.

 

저 문제의 문구가 붙어있는 위치도 그것이 거기에 위치했다는 것 자체로 어떠한 의미를 띤다. 나는 그게 ‘비켜주세요, 조심해주세요’라는 기의를 가진 기표라고 본다. 누군가는 ‘아니에요, 저는 그런 의미로 붙인 게 아니에요’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진심으로 스스로 반성해보기 바란다. 무의식 중에라도 그런 요구를 담았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게다가 그 위치가 그 자체로 어떤 내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무수하게 쏟아져나오는 유사 제품들의 의의를 어디서 발견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가령 비슷한 제품들은 일관되게 한 가지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 ‘내 새끼 타고 있다!’, ‘우리 집 왕자가 타고 있어요’, ‘내 새끼 까칠하다!’ 등등... 이 모든 문장이 ‘비켜라!’라는 주장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거다. 저 위치에 붙여질 상품들이 모두 위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생산될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 위치가 이미 우리 사회 속에서 저런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이미 너도 나도 저 위치의 어떤 문구를 이런 의미로 (무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왼쪽 뒤창에 뭔가 붙어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말을 읽어보지도 않고 불쾌감을 느낀다), 혼자 그런 의미로 붙인 게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 언어의 숨겨진 의미와 관련해

 

모든 문장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인간이 언어를 화용론적으로, 혹은 일종의 놀이로 생각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어떤 문장이나 명제가 진짜 그 말을 의미한다고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명시된 문장이라는 건 사실 말하고 싶은 내용을 반대로도 표현하고, 한참 우회된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국말은 이런 측면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면이 많다. 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지 않은가. 그건 그만큼 한국말이 숨겨진 의미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얼핏 중립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문장이 상당히 자기기만적이라고 본다. 저걸 붙이는 사람은 필시 자기가 오만하고 눈살 찌푸려지게 하는 문장을 쓴 게 아니고, 다만 어떤 중립적인 사태를 표현하는 명제만 붙여놓은 것이기 때문에 잘못한 일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언어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다... ‘우리 아기가 타고 있어요’는, 사태를 기술하는 명제가 아니라 그런 것처럼 위장된 명령어다. 저 문장은 사실 ‘우리 아기가 타고 있어요... 그러니 살살 운전해주세요’라는 뜻을 가진 문장이란 뜻이다. 다만 뒤 문장까지 다 붙여버리면 너무 노골적이니까 대부분 저기까지 붙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 의미가 뭔지 모를까? 인간을 너무 바보들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왜 다들 저 문구를 보고 불쾌감을 느끼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나?

 

흥미로운 건 저 문구가 어떻게 변형되느냐에 따라 붙인 사람 성격이 나온다는 것이다. 먼저 진짜 안티소셜 같은 부류가 있다. 이 사람들은 사회성이고 눈치고 뭐고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직접적인 명령조로, 그것도 자기 자식만 중요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액면 그대로 기술한 문장을 갖다 붙인다. (예 : ‘내 새끼 까탈스럽다!’, ‘우리 새끼 건드리면 가만 안 놔둬!’ 등등)

 

정반대쪽에는 굉장히 사회적으로 눈치가 발달한, 뉴로틱한 계통의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붙이기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만드는 건 싫어서 문구 뒤에 이런 저런 추가 내용을 붙인다. 추가 내용이라 함은, ‘이 문장은 당신을 보라고 만든 게 아니니 불쾌해하지 마세요!’라는 뉘앙스를 덧붙여주는, 일종의 확인 사살용 멘트 같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혈액형을 명시한 문구 같은 것이 그렇다. 그 문장을 추가로 덧붙임으로써, 메시지의 발신자는 이것이 뒤차 운전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구조대원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만들고, 그로써 타인의 비난을 피한다.

 

그래서 결론은?

 

나도 모르겠다. 사실 붙이고 말고는 자유다. 그 정도 자유도 없어서 쓰겠나. 근데 다만 제발 최소한 알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저런 문구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자기들이 다만 ‘사태의 기술’이라고, 중립적인 문장이라고 백날 주장해봤자 그 문장은 본성상 그럴 수가 없다는 것. 그걸 좀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문장을 쓸 거면, 차라리 밑에다가 ‘그러니 조심해서 운전할게요~’라는 식의 말이라도 좀 갖다 붙이자. (실제로 우리 부부는 저런 식으로 문구를 붙일까 생각 중이다. 우리가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운전자에게 명시적으로 밝힐 필요는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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