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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영화 <8과 1/2>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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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나서 한동안 여운이 남는 영화들이 있다. 특히 내가 영화의 주제와 관련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던 시기는 더 그랬던 것 같다. 어제 본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1/2>이라는 영화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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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혼의 중년 남성 귀도는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다. 모두들 그와 함께 영화를 찍고 싶어하고,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제작자, 오디션 배우, 비평가들이 넘쳐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완벽한 남자이지만, 실제 그의 삶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 별거 중인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냉기가 흐르고, 이 때문에 정부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아내와 달리 화려하고 육감적인 여성이다.

 

사실 그의 여성 편력이 처음은 아니다. 주변에 넘쳐나는 여배우들 때문이었을까. 그는 한 여성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황한다. 아내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도망다니기만 하는 자기 자신이 불만족스럽지만, 그렇다고 정착하기도 싫은 상황이다. (사실 어찌 보면 욕 먹기 딱 좋은 캐릭터다)

 

귀도는 이런 실존적인 불안을 작품으로서 승화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의 삶과, 그 삶 속에서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 어떤 영화를 제작 중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살면서 만났던 인물들이 영화 속에 현현하며 모종의 역할을 떠안게 된다.

 

귀도는 자신의 아홉 번째 작품이 될 이 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멋지게 장식하고, 그로서 어떤 완성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화가 너무나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해서였을까, 영화 제작 과정은 계속해서 삐그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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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주인공 '귀도'가 현대적인 의미의 햄릿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햄릿은 종종 정통적인 신경증자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정통적이라는 말은 그의 무의식이 섹슈얼한 욕동과 그에 대한 반동들로 구성돼 있다는 것을 뜻한다.

 

햄릿은 부친 살해와 모친 강탈의 욕망을 대리 충족해준 삼촌을 보며 무의식적 죄의식에 시달리는 한편, 그런 삼촌을 어쩌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가감정과 그로 인한 결단의 어려움. 이 두 가지는 햄릿이라는 신경증자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다.

 

어떤 면에서 귀도에게서도 이런 신경증자의 냄새가 난다. 영화는 중간중간 그의 어린 시절 판타지를 보여준다. 가령 유년기의 귀도는 친구들과 매춘 여성을 불러 세워 음란한 춤을 추게 만들고는 그녀에게 돈을 찔러 넣어준다. 반동의 요소도 분명 있다. 그 일로 귀도가 다니던 미션 스쿨의 신부님에게 호되게 질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들은 귀도의 무의식에 모종의 오이디푸스적 배경이, 그 섹슈얼한 욕동들의 차원이 깔려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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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흥미로운 건 귀도의 내적 세계가 이러한 욕동의 차원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른 요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적 대상의 차원이다.

 

이런 차원은 사실 정통 정신분석학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던 부분들이었다. 대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멜라니 클라인을 필두로 한 대상관계이론이 등장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내적 대상이란 무엇일까. 쉬운말로 그것은 일종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종종 하나의 극장으로 비유된다. 프로이트가 그 극장 안에 흐르는 힘(욕동)을 중시한 나머지 배우들의 역할을 간과한 면이 있다면, 대상관계 이론은 그러한 배우들이, 그리고 그 배우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강조를 한다.

 

우리의 마음 속 극장에서는 배우자, 애인, 친구, 스승, 심지어 애완동물 같은 내적 대상들이 서로 역할을 맡아 ''라는 한 명의 배우와 상호작용을 한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은 그러한 극장 자체가 한 인간의 판타지를 대변하고, 그 판타지가 그의 정신세계를 결정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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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이 흥미로운 점은 내면의 극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영화에서는 역할이라는 테마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귀도는 계속해서 주변 인물들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는다. 오디션을 기다리는 배우들은 감독님, 대체 저의 역할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는 나더러 어떤 역할을 하라는 거야?’라고 묻는다. 귀도는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리저리 도망만 다닌다.

 

그 중에서도 내가 인상깊게 본 장면은 단연 '하렘'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와 아내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던 귀도는 무심결에 어처구니없는 일(나는 이런 비논리적 결단이야말로 무의식의 작동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을 저지르고 만다. 자신과 정부가 함께 머물던 휴양지에 아내를 초대한 것이다.

 

정부와의 육체적 관계를 원하기는 하지만, 아내에게 용서는 구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결단을 내릴 용기는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그저 아내에게 보고싶다는 말을 해서, 아내가 자신을 찾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자신을 구원해주게 만드는 것이다. 상당히 신경증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내와 야외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뿔싸. 정부가 마침 똑같은 장소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귀도는 자기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놓고서 이런 상황을 불편해한다. 아내는 둘 사이에 뭔가 있음을 직감하고 귀도를 추궁한다. 귀도는 저런 여자를 누가 좋아하느냐며 발뺌하더니 뭔가 불편한 듯 썬글라스를 고쳐 올린다.

 

이어서 나오는 장면이 압권이다. 갑자기 귀도의 아내가 정부에게 다가가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니 어쩜 이렇게 옷이 예쁠 수가 있어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니에요! 부인이 훨씬 더 멋지신 걸요. 전부터 꼭 뵙고 싶었어요. 그러더니 두 사람은 갑자기 하하호호 웃으며 왈츠를 추기 시작한다. 이어서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귀도의 얼굴이 비친다.

 

영화는 갑자기 장소를 바꿔 귀도의 유년시절의 집을 보여준다. 어릴 적 집에는 여자 어른들이 넘쳐났고, 그들은 귀도를 목욕시키고 나면 꼭 하얀 천으로 그를 감싸 섬세하게 애무해주곤 했다. 그에게 유년기의 집은 어떤 에로틱한 판타지의 응집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집에 난데없이 아내와 정부, 그 외에 그와 스치듯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집이라는 공간은 하렘이라는 상징을 띠면서 재해석된 공간으로 그의 판타지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귀도는 벌거벗은 상태에서 하얀 천만을 두르고 있고, 여성들은 그런 그를 정성들여 목욕시켜주고 있다. 하렘을 꽉 채우고 있는 이 여성들에게는 저마다 역할이 부여돼 있다. 에로틱한 성애적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시중을 드는 역할도 있다.

 

역할이 상실되기도 한다. 기억에서 잊혀지거나 나이가 들어 노쇠한 여성들은 집 위의 다락방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다락방으로 간다는 것은 귀도의 판타지 속 여성들에게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파리에서 만난 적이 있던 한 무용수는 자신이 다락방 신세를 지게 됐다는 것을 깨닫고는 오열하기도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현실 속의 여성들과 달리 이 판타지 속 여성들에게는 명확한 역할이 부여돼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런 한에서, 그녀들은 현실 속 여성들의 이미지와 상당히 괴리된 면모를 보인다.

 

이를테면 판타지 속 귀도의 아내는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도 귀도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착실한 내적 대상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그녀는 주부들이 입고 있을 그런 복장을 하고 있는데, 그 복장은 어릴 적 그를 목욕시켜주던 어머니가 입던 바로 그 옷이다. 유년시절의 어머니에게서 느꼈을 성애적인 감정마저도 아내 안에 투사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하렘 장면은 귀도의 현실과 환상이 가장 극단적으로 괴리되는 부분이자, 그런 한에서 모종의 클라이막스 기능을 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화해와 통합을 시도하는 결말부보다 이 하렘 장면이 더 기억에 남았다. 기억에도 더 많이 남았고, 그만큼 감정의 움직임도 더 많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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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 하렘 장면을 보고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웃음이 터져나왔던 것 같다. 뭔가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신기한 것은 동시에 어떤 상실감이나 아련함 같은 것도 느껴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내 경험의 일부가 묻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역할의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딸이 태어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되면서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이자관계가 삼자관계로 변한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2에서 3으로 변한다는 것 이상의 대변혁을 의미했다.

 

나와 아내라는 현실적 대상을 두고 봤을 때, 내가 우리 둘에게 부여했을 내적 대상이란 게 있었을 것이다. 한 때의 우리 아내는 (그리고 아내에게 나는) 단순히 로맨틱하고도 성애적인 대상으로 내면의 극장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내가 거기에 투자하는 리비도랄지 욕동이랄 것도 규정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살다보니,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다보니, 내 안의 극장에서 아내가 맡은 역할이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 아내의 역할에 내 어머니(사실 엄마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의 역할을 기워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도 모르는 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 그게 무의식적으로 분출될 때면 아내가 조금 버거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가 딸이 태어났고, 바닥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사람들은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바라보는 역할에서, 둘이 함께 아이를 바라보는 역할로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나도 결국은 그런 역할을 떠맡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노정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세상 달관한 듯 사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아내도 역할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는지 짜증이 늘었다. 아내는 원래 일하는 걸 좋아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집에서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고, 손싸개와 수건을 빨고, 그렇게 하루 24시간을 보낸다. 아내는 자신의 신체 이미지의 변화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기 전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이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아내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나는 점차 아내라는 내적 대상에게 미안함과 죄의식을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자꾸 미안한 아내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우리 아내는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열정을 갖고 사회를 위해 힘쓰는 그런 종류의 진취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변화를 막기는 어려워보였다. 최근 월급이 더 적은 대신 집에 일찍 퇴근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겼건만, 이런 변화는 그저 육아 부담을 나눈다는 일로 완전히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가장 슬펐던 순간이 떠오른다. 이런 걸 슬프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지금쯤 정신 없이 아이를 보고 있을 아내 입장에서 보면) 사치라는 건 나도 안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은 나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기회니까 그냥 솔직하게 써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 슬프다는 건 어쩌면 나는 아내와 내가 결혼 전의 역할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극장에서 더 이상 옛날의 그 배우를 찾아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귀도처럼 시간이 지나 퇴색된 배우를 다락방으로 올려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 배우를 따라 과거의 나라는 배우도 함께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 슬프고, 또 불안하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아내라는 배우에게 투사했던 엄마의 역할을 생각보다 더 빨리 철수시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들었다. 그것은 내가 투사할 역할이 아니라 우리 딸이 투사할 역할이다. 나는 그것을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 내 무의식이 그런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내 의식만큼은 그것을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매일같이 울음을 그치지 않는 딸을 볼 때면 귀도를 쫓아다니던 배우들의 질문이 겹쳐진다. 아니, 어쩌면 내가 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도때도 없이 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묻는다. ‘무엇을 원하니? 아빠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니? 말 좀 해줘!’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내 극장 안의 배우들은, 그리고 나라는 배우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내 안의 극장이 무너지고 새로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또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과 불안을 느끼곤 한다.

 

영화에서 내 가슴을 후벼팠던 장면이 있어 아래에 첨부해본다. 귀도의 판타지 속에서, 귀도의 아내는 그의 소망대로 엄마의 앞치마를 입고, 엄마의 따뜻함과 배우자의 사랑을 모두 담은 그런 표정을 하고서 그만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녀는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이불과 옷가지를 정리하더니 갑자기 귀도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묻는다.

 

우리... 모두 함께 잘 살고 있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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