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포그래피 오브 테러
박물관을 나와 이번에는 "토포그래피 오브 테러"로 향했다.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저쪽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장소가 보인다. 체크포인트 찰리였다. 내 여행 계획에는 없었지만, 보이는 김에 잠깐 방문하면 좋을 것 같아 들러 보았다.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 있는 베를린 장벽의 조각. 이 조각 하나에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장벽에는 덕지덕지 그래피티 같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동독 쪽 보단 서독 쪽 벽에 훨씬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동독 쪽 벽은 비교적 깨끗했다고. 게다가 장벽의 아랫부분에는 벽이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판 형태로 된 콘크리트를 연결해 놓았다. 잠깐, 여기서 문제. 그렇다면 이 콘크리트 판은 동독과 서독 중 어느 쪽 부분으로 향해 있었을까? 답은 서독이다. 콘크리트 판의 주 목적은 "동독 국민들이 서독 쪽으로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곳이 토포그래피 오브 테러다. 약 100미터 정도에 걸쳐 장벽이 보존돼 있다. 벽의 위쪽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통같은 것이 길다랗게 이어붙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벽을 타고 넘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벽 위로 먼저 올라간 사람이 뒤이어 오는 사람들을 잡아 끌 수 없도록 저렇게 미끄럽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장벽 바로 옆에는 일종의 독일 근현대사 박물관 같은 것이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역시나 익숙한 나치 관련 사진 자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처럼 베를린에서는 어딜 가나 독일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도시 전체가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하나의 박물관이라고 봐도 좋다.
박물관 안에서 한 영어권 국가 학생이 선생님(가이드인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선생님의 발음이 워낙 명확하고 소리가 커서 나도 듣기가 편했다. 교사는 나치 시대의 독일 장병들이 행과 열을 맞춰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학생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자 얘들아 이런 사진을 우리는 프로파간다라고 해. 프로파간다가 뭔지 아니?"
"네"
"그래. 그럼 지금 여기 보이는 이 군대의 사진이 선전하고자 하는 바는 뭘까?"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대답하지는 않는다.
"자. 잘 생각해봐. 이 사진은 분명 특정한 목적을 지니고 있단 말이야. 사람들로 하여금 뭘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자기들 힘이 세다는거요?"
"그렇지! 이 사진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파워'야"
구경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장벽 앞에서 한 무리의 영어권 국가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그래서 나도 몰래 옆에 가서 훔쳐들어봤다.
"분단 초기 저 장벽을 넘어서 서독으로 넘어온 독일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당시 문헌에 따르면 자그마치 8000명 정도의...... '장벽 경비병'들이 이 장벽을 넘었다고 기록돼 있거든요"
하하하 하고 관광객들이 웃는다.
포츠다머 광장,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토포그래피 오브 테러를 나와 이번에는 포츠다머 광장으로 가 보았다. 포츠다머 광장에는 딱히 특별한 게 없었다. 그냥 쇼핑센터와 문화시설이 몰려 있는 번화가 같은 곳이었다. 나에겐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 않았다. 위의 사진은 광장 옆에 있는 소니 센터다. 지금은 이 장소가 소니의 소유가 아니란다. 책에서 이 근처에 레고랜드가 있다고 본 걸로 기억해서 얼른 달려가 봤으나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하여간 이 동네는 뭐만 보려고 하면 죄다 금방 문을 닫아버린다.
소니센터의 극장 옆에 설국열차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냄쿵민수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
소니센터 옆에서 만난 한 무리의 관광객들. 독일에는 이처럼 8명 정도가 빙 둘러 앉아서 페달을 밟으며 나아가는 자전거가 있는데, 이 자전거를 타고 관광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신선하기는 하지만 그닥 멋대가리는 없다.
이번에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에 가보기로 했다.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심하게 훼손됐으나, 독일인들은 앞으로는 전쟁을 벌이지 말자는 의미에서 훼손된 교회를 그대로 놔뒀다고 한다. 옆에는 실제 예배를 드리는 신교회가 설치돼 있다. 신교회의 외부는 위 사진처럼 다각형 모양으로 생겼는데, 사진만 그런게 아니라 실제로 봐도 무지하게 볼품 없다. 기왕 만들 것 좀 예쁘게 만들지 왜 저렇게 임시방편 처럼 만든 건지 잘 모르겠다. 나름의 의미가 있나?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면 댓글을 남겨주기 바란다.
하지만 내부는 굉장히 예쁜 편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해 안을 비춘다. 책에서 보던 것보단 예배당의 크기가 매우 작아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교회를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쿠담이라는 쇼핑가를 통과해보기로 했다.
독일 도시에서는 심심치 않게 스타벅스를 볼 수 있다. 정말 눈에 밟히도록 많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다. 과거 세계화 (사실 미국화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의 지표가 '맥도날드'였다면 요즘은 '스타벅스'로 대표되고 있는 것 같다.
길을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앙증맞게 생긴 자동차. 저 덩치 큰 독일 남자가 저 조그만 차를 타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내가 다 답답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저런 차를 몰고 거리를 활보해도 되는 걸까? 우리나라도 자동차의 규격과 관련된 제한이 많이 풀려서 주행 가능한 자동차의 범위가 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종국엔 그런 방향으로 갈 거라고 믿는다.
빗나간 로컬 푸드, 그리고 로스트 인 베를린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는 깔끔했으나, 역시나 좀 추웠다.
생각해보니 오늘 파스타 한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안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적당한 식당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대부분 문을 닫았고 케밥 관련 가게나 그 외 다른 나라 음식을 하는 곳만 몇 군데 열려 있었다. 하지만 난 독일에 있을 때 만큼은 독일 음식을 먹고 싶다. 사거리 쪽으로 조금 나가자 술집 겸 식당이 보인다. 사람들이 꽤 앉아있는 걸로 봐서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되는 것 같다.
식당에 들어가자 한 해맑은 독일 여학생이 서빙을 하고 있다. 일단 영어로 된 메뉴판을 달라고 한 다음, 메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나 영어로 돼 있다고 해도 뭐가 뭔지를 모르겠다. 분명 여기서 밖에 맛볼 수 없는 고유한 독일 음식이 있을 것이다. 파스타 종류도 있고 스테이크 종류도 있었다. 파스타는 이탈리아 음식이니까 패스. 스테이크는 가격이 너무 비싸니가 패스. 그럼 뭘 시킨단 말인가? 네이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음식 이름 가운데 움라우트가 많아서 폰으로 타이핑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난 폰으로 움라우트 표기하는 방법을 모른단 말이다!!! 게다가 네이버에는 그닥 자료가 많지 않았다. 약 10여분을 혼자 씨름을 하다가 결국은 포기, 직원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있잖아. 이 고장에만 있는 로컬 푸드를 좀 먹어보고 싶은데 말이지... 추천 좀 해줄래?"
"로컬 푸드? 우리 가게는 터키 음식점이야..."
"..."
제기랄. 터키 음식점만 줄곧 피해서 찾아왔건만 하필이면 들어온 곳이 터키 음식점이라니.
"음... 그럼 독일 음식 비스무리한 거라도 좀 없을까?"
"음... 굳이 이 지역 음식과 비슷한 걸 원한다면 이 슈니첼은 어때? 이건 오스트리아 음식이긴 하지만."
"아... 사실 내가 내일 오스트리아로 떠날 예정이거든... 거기서 슈니첼을 먹기로 했어"
"그럼 암거나 시켜 ㅋㅋ"
결국 나는 그녀의 추천에 따라 소시지와 토마토소스로 만들어진 어떤 터키식 그라탕 같은 것을 시켰는데, 꽤나 맛있었다. 저녁이니 맥주도 하나 시켰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와 예술의 전당의 모차르트 까페라는 곳에 가서 헤페바이젠 맥주를 마셔본 적이 있는데, 그녀나 나나 참 맛있어 했던게 기억이 나서 에딩어의 헤페바이젠 맥주를 시켜보았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난 진정 맥주와는 인연이 없나보다.
술도 좀 들어가고 하니 갑자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여직원이 인상도 좋고 친절하기도 한 것 같아서 얘기나 몇마디 나눠볼 수 있을까 쓸데 없이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이 노래 너가 선곡한거임?"
"응 ㅋㅋ"
"이 노래 영화 사운드트랙이잖아. 더 페뷸러스 데스티니 오브 아..."
"아멜리 뿔랑!!!"
"오... 너도 이 영화 아는구나. 나 이 영화 완전 좋아하거든"
"아 그래?"
"응. 내가 9월에는 프랑스에 놀러갈 계획인데 거기 가서 아멜리가 일하던 까페에도 한번 가볼 생각이야"
"그렇구나. 가서 재밌게 놀아 ㅋㅋ"
뭔가 반응이 썩 적극적이지 않다. 그 뒤로도 몇마디 말을 걸어보았으나 그녀는 그저 짧게 대꾸할 뿐, 대화를 더 진전시키려는 욕구가 없어보였다. 역시... 동양 남자는 어디서나 인기가 없다... 슈발
밥을 먹고 나오니 대략 열시 반 정도였다. 숙소로 바로 돌아가자니 뭔가 아쉽고 그렇다고 목적지를 정해서 어디를 찾아가기도 애매한 시간인 것 같아서 그냥 눈 앞에 보이는 전차를 잡아 탔다. 왠지 느낌상 전차는 운행 거리가 짧아서 멀리 가지 않을 것 같았고, 계속해서 순환 코스를 뱅뱅 돌 것 같았다. 그래서 전차를 타고 거리 구경이나 하다가 다시 같은 장소에 내려 숙소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전차는 이처럼 창문이 넓게 뚫려 있어서 거리를 구경하기에 좋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전차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 혼자 있을 때도 많았다. 순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전차가 열한시 전에 끊겨버리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걱정이 돼서 운행시간을 물어보려고 운전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아뿔싸. 이놈의 전차는 마치 전철같은 구조로 돼 있어서 운전사와 이야기를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냥 자리로 되돌아와 앉았다. 뭐 전차는 그리 멀리까지 운행하지는 않을테니까 그냥 좀 앉아있어보자.
그런데 이놈의 전차가 자꾸만 시의 외각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전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멀리 도심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밤이 늦어서 그런지 시의 외곽은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가로등도 죄다 꺼져 있었다. 거리에 차도 없었다. 시의 외곽으로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나 한명 태운 전차만이 어두운 밤길을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불안이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지금 내려야 하나? 하지만 내릴 수 도 없었다. 버스가 없으니 돌아가려면 같은 전차를 탈 수 밖에 없는데, 저 추운 밖에서 덜덜 떨면서 언제 올지 모를 전차를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정류장에 사람도 없어서 무섭다. 에라이 모르겠다 버틸 때가지 버텨보자 하고 그냥 앉아 있었다.
약 15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전차가 종점에 도착한 듯 둥글게 선로를 따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승객 2명이 전차에서 내리려고 일어나고 있었다. 난 팔짱을 끼고 그냥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한 훤칠한 독일 청년이 갑자기 날 보더니 웃으면서 뭐라뭐라 독일말로 말한다. 그래 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보자. 일단 영어를 하는 지부터 물어보자.
" 너 영어 하니?"
"응 조금"
"이 차 말이야. 이렇게 돌아서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니?"
"응. 이대로 돌아서 다시 시내로 데려다 줄거야."
"휴 다행이다. 고마워!!"
"응 그래 안녕~"
천만 다행이었다. 낯선 독일땅에서 미아 신세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좌석에 앉아 전차가 다시 출발하기를 기다리는데 전차 운전사 아줌마가 나오더니 나에게 뭐라뭐라 독일말로 이야기 하길래 이걸 타고 다시 시내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여자는 잉글리쉬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나도 몰라 하는 손짓과 함께 전차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뒤 여자가 돌아와 다시 전차를 운행하기 시작했고, 나는 안전히 도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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