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볼트 대학교
구국립미술관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훔볼트 대학교가 있다. 사실 나는 훔볼트 대학교를 방문하는 것 자체에는 그렇게 큰 의의를 두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저 김덕영 교수가 이야기했던, 대학교 본관 계단에 걸려 있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번째 테제'를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대학교 정문의 모습이다. 학교는 생각보다 매우 작았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 나라의 대학 캠퍼스 처럼 한 장소에 모든 단과 대학이 몰려 있는 것은 아니고 베를린 내 곳곳에 대학 건물들이 설치돼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학교가 오래 되었다 보니 처음에는 이렇게 작은 크기로 지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말하자면 이 건물은 훔볼트 대학교 전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본관 건물인 셈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학교에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혹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기 한 편에 어디서 익숙한 듯한 이름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동상이 하나 서 있고 그 아래에 무슨 Planck 라고 써 있는 것 같다. 설마... 내가 아는 그 플랑크인가? 해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역시나 그 플랑크다. 동상의 아래에는 Max Planck라고 선명히 적혀 있었다.
사실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는 플랑크가 이 곳에 재직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익숙한 이름을 보니 굉장히 반가웠다. 나는 플랑크의 이론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물리II를 선택했고, 자연과학 대학을 나온 나로서는 그의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왔었다. 플랑크는 최초로 양자라는 개념을 도입, 에너지의 양이 연속적으로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아인슈타인의 광자설이나 슈뢰딩거의 파동역학 등은 사실 플랑크의 이론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그는 현대 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인 것이다.
학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메인 로비가 보였다. 그리고 그 바로 뒤로, 내가 고대하던 바로 그 문구가 내 바로 정면에 딱! 하고 박혀 있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장 자체가 나에게 어떤 큰 감동으로 와닿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포이어바흐나 맑스의 이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으며, 그들 사상의 흐름을 큰 눈으로 보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의 이 열한 번째 테제가 철학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몸으로' 느끼지는 못한다. 그냥 사람들이 말하길 워낙 중요하다니까 그냥 중요한가보다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내가 방금 전 맑스의 동상을 처음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맑스라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이처럼 대학교 본관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정말 이 곳은 다른 나라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학자들의 초상
혹시나 건물 안을 돌아다녀볼 수는 없을까 해서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보았다. 아무도 나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사람 자체가 아무도 없었다. 독일의 대학교에는 주말에 정말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듯 했다. 그런데 그렇게 계단을 올라서서 2층 복도의 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엄청난 감동을 느끼게 되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학자들의 초상들이 벽에 주르륵 붙어 있었다. 사진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코흐와 아인슈타인, 그리고 플랑크
한스 슈페만
코흐는 '코흐의 원리'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코흐는 어떤 병원균에 의해 환자에게 병이 발생했을 때, 그 병원균이 이 질병의 원인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방법론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이다. 슈페만의 경우 발생학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슈페만은 자신의 어린 딸의 머리카락을 이용, 도롱뇽의 알을 그것이 부화하기 이전에 몇 개의 부분으로 잘라 나누었다. 잘라진 각 부분이 각각 성체로 자라나는 것을 본 슈페만은 알의 각 부분이 모두 성체가 될 수 있는 역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사진을 지나 계단을 하나 더 올라가 표지판을 보니 3층에는 철학과 연구실이 위치해 있단다. 연구실 문 옆에는 이 학교가 배출한 훌륭한 교수들의 초상이 주르륵 붙어 있다.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연구실 옆에 차례로 피히테, 셸링, 헤겔의 초상이 붙어 있다.
쇼펜하우어의 초상도 붙어 있다.
쇼펜하우어는 원래 헤겔 및 그의 관념론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는데, 헤겔과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해 이 대학교에서 일부러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수강생이 헤겔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가는 바람에 그의 강의실에는 학생이 5명 밖에 남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그가 쓴 유명한 책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도 이 헤겔에 맟서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번엔 연구실 맞은편의 게시판을 살펴봤다. 유독 눈에 띠는 게시물이 있었다. <Hegel's philosophy of spirit>.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선조의 철학을 공부하는 이 민족이 느낄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먼나라 독일의 철학을, 먼나라의 언어를 사용해 공부하는 학생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들이 느낄 포부와 자부심이 어떠할 종류의 것일지, 나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 것 같다.
그 외에도 내 눈길을 끈 게시물은 <Memory and Mind>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인지심리학이나 뇌과학과 관련된 세미나에 대한 게시물일 것이다. 오늘날 뇌과학을 빼놓고 철학이나 과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뇌과학 연구의 중심은 주로 영미 지역에 치우쳐 있는게 사실이다. 한 때 관념론으로 세계의 철학을 지배했던 이곳마저 21세기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영미의 철학, 과학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는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어딘가 씁쓸함이 느껴졌다.
베를린 대학 탐방을 마치고는 학교 뒤편으로 가봤다. 뒤에는 조그마한 뜰이 있었다. 연구생인 듯한 사람 몇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구글맵을 보니 바로 대학교 뒤에 헤겔 광장이 있다길래 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헤겔의 동상이 근엄한 표정으로 베를린 대학을 굽어보고 있었다.
한낱 동상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헤겔철학의 본거지에서 헤겔을 보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생각 같아선 이 동상 앞에서 사진을 한 번 찍고 싶건만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는다. 결국 헤겔의 머리만 잔뜩 찍고 왔다. 광장 옆에 헤겔이 살았던 곳의 터가 남아있어서 명패가 붙어있다는데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 있었을 텐데 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리고 헤겔 광장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건 없다. 사실 광장이라기도 그렇다. 그냥 헤겔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그마한 공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도 공사. 저기도 공사. 공사가 판친다.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일단 숙소에 가서 짐을 풀기로 했다. 운터 덴 린넨을 거쳐 숙소로 향했다. 운터 덴 린넨은 거의 베를린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라고 보면 된다. 이 도로 주변으로 거의 모든 주요 관광지가 몰려 있다. 베를린에서 뭘 구경해야 할지 막막할 때는 그냥 이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걸어가는 길에 다시 한번 베를린 시내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어딘가 지저분한 느낌이다. 칙칙한 날씨 때문일까? 날씨도 날씨지만, 일단 이 동네 무지하게 공사 많이 한다. 어딜 가나 공사판이다. 베를린에서는 도시 행정 계획이 매 5월 마다 갱신되는 걸까? 그래서 지금 올해에 남은 예산을 쓴다고 이렇게 공사들을 벌이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리너 바이스와 함께, 나홀로 만찬
숙소 건물로 가보니, 역시 3시가 지나서야 손님을 받는 듯 했다. 아까는 굳게 닫혀 있던 키오스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젊은 여자 직원이 다른 손님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온 베를린 도시를 활보하고 다녔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나는 한 껏 지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너네 숙소 체크인하기 진짜 힘들구나..."
"응. 우리는 3시 부터 근무를 하거든. 아까 아침부터 여기 와서 고생했다며? 사람들한테 얘기 들었어"
"나 밥 좀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이 근처에서 베를린만의 고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 괜찮은데 혹시 아니? 별로 비싸지 않은 데였으면 좋겠어"
"하케셰 마르크트 역으로 가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다 보면 브라우하우스라는 데가 있어. 거기 정도면 괜찮을거야"
나는 짐을 풀고 바로 건물을 나왔다. 여자가 알려준 길을 따라가 보니 그 식당이 나왔다. 시간이 애매해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낮에는 주로 식당으로 영업하고 밤에는 주로 호프집으로 영업하는 듯 했다. 창가 옆자리를 골라 앉은 뒤 영어로 된 메뉴를 갖다 달라고 했다.
내가 독일에 여행오면서 지키기로 한 약속이 하나 있다. 내가 먹어본 것이나 한국에서 먹어볼 수 있는 것은 절대 먹지 말 것. 독일에서 밖에 맛볼 수 없는 것만 먹을 것. 그런데 이 놈의 메뉴판은 말이 영어 메뉴판이지,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음식의 이름은 그대로 독일어로 돼 있고, 요리의 재료만 영어로 돼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요리의 재료만 나열돼 있는 상태에서 그 요리가 어떤 것인지 머릿 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글쎄,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림도 없는 상태에서 이를테면 '삶은 소시지와 당근, 그리고 그 외의 야채를 버무려 만든 요리' 라는 말만 보고 그 음식의 모양새를 상상해낸다는 게 나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다. 제발 음식점의 메뉴판에는 사진 좀 넣어놨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좋을 텐데, 왜 사진을 넣지 않는 걸까. 결국 점원에게 물어볼 수 밖에. 나는 물에 삶은 흰 소시지와 프렛즐, 굴라쉬 수프가 있는 메뉴를 시켰다. 음료로는 베를린에서 유명하다던 베를리너 바이스를 시켰다.
굴라쉬나 프렛즐은 거의 예상할 수 있는 맛이었다. 소시지는 좀 신선했다. 물에 삶은 저 소시지는 일단 굉장히 부드럽다. 그런데 속살은 엄청나게 부드러운 반면 껍질이 겁나게 질겨서 칼로 자르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처음엔 문명인 처럼 얌전히 먹어보려고 칼과 포크를 들었지만, 이내 열받아서 손으로 들고 물어 뜯어가며 먹었다. 물에 삶은 것이라 그런지 그닥 짜지도 않다. 소시지를 먹고는 싶은데 좀 소화가 잘 될만한 걸로 먹고 싶다 하는 사람은 이 삶은 소시지를 먹어보길 추천한다. 베를리너 맥주라는 것은 맥주에 달짝지근한 탄산음료를 섞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맥주로 만든 칵테일이라고 해야 하나. 책에서 나온 것처럼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물론, 나도 술을 마실 때는 여성적 취향을 갖고 있어서 엄청 맛있게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영상)
밥을 먹고 있는데 약 30명 가량의 독일 대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더니 왁자지껄하게 맥주를 마신다. 이것이 바로 소위 독일의 맥주 문화라고 하는 걸까. 사실 이 날 처음으로 독일인이 맥주 마시는 모습을 제대로 살펴봤던 것 같다.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흥겹게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는 와중에, 한 쪽 구석에서 난 왕따같이 혼자 베를리너 맥주를 홀짝거리며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저 사이에 껴서 같이 놀아보면 좋으련만. 이방인 놀이가 재밌긴 하지만, 가끔은 현지인들 사이에 껴서 놀아보고 싶기도 하다.
홀로코스트 추모비, 브란덴부르크 문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했다던 브란덴부르크 문에 가보기로 했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아 걸어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구글맵을 살펴보니 내가 가보고 싶었던 홀로코스트 추모비도 있단다. 잘됐다. 일단 추모비로 가보았다. 난 그래도 밤에 조명 정도는 켜놓을 줄 알았는데 정말 새까맣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조형물들의 어렴풋한 형체만이 보일 뿐이었다. 조형물들의 중심부로 들어가보니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지면이 아랫쪽으로 움푹 파여 있어서 걸어 들어갈수록 추모비 조형물들의 높이가 점점 높아지더니 이윽고 내 키의 두배에 달하는 높이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마치 미로같다.
낮에 보면 이런 모습이란다. 이건 내가 찍은 사진은 아님.
사실 이 추모비라고 하는 건 별게 아니다. 넓은 광장에 비석 같은 돌 모형을 촘촘히 박아 넣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은 이 위에 걸터앉아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간식을 먹기도 한다. 나에게 이 추모비 조형물은 일종의 거대한 반성문 처럼 느껴졌다. 혹은 보상행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일종의 의식(儀式) 이라고나 할까. 의식(儀式)이라는 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어떠한 실용성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천주교나 불교에서의 종교행위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성호를 긋거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성수를 찍어 이마와 가슴, 그리고 양 어깨에 묻힌다. 절에서는 목탁을 두드리거나 염불을 외고, 백팔배를 한다. 누군가는 거기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혹은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종교행위는 바로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측면에서 그것의 진짜 의미를 찾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얼핏 무의미해보이는 특정한 행위나 말을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이 반복행위에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백팔배 처럼) 그 행위는 의식이 되고, 그 의식이 어떤 마음의 안정과 종교적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이 추모비 또한 말하자면 일종의 '형상화된 백팔배'같은 것은 아닐까.
브란덴부르크 문의 경우, 그냥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마치 광화문에 온 느낌이랄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문 앞에는 관광객과 장사꾼들이 즐비했다. 심지어 마차들도 줄지어 있었다. 문을 지나쳐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숙소로 돌아왔다. 대단히 피곤한 하루였다. 내일은 어떤 일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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