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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글들/[독일 관념론 정리]

J : [독일 관념론] 491 ~ 502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3. 13.

 

II. 정신 현상학

1. 발단

헤겔에게서 이성법과 이성 종교는 하나요, 동일한 절대자에 뿌리박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 철학의 과제는 이 절대자의 인식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또한 그의 사상에 따르면 법, 국가, 및 종교의 본질 역시 절대자의 본질에서 비로소 "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확고하게 윤곽 잡힌 절대자의 개념은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단편에서 발견된다. 그의 절대자 이해는 절대자를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로 이해한 스피노자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지만, 주요한 점에서는 그를 넘어선다. 헤겔에게 절대자는 "정신", 즉 "절대정신"이다. 그에 따르면 절대자는 세계 속에서 정신으로 계시된다. 헤겔은 여기서 "계시"를 말할 때 여전히 종교의 계시를 생각하고 있다. 역사상의 모든 종교는 그에게 하나의 절대적 정신의 현상 형식으로 간주된다. 타당한 종교는 필연적으로 순수한 "정신의 종교"인 것이다. 기독교의 정신 속에서 그는 이 타당한 종교를 인식한다고 믿는다.

헤겔은 이 절대자 속에서 통일적인 것과 동시에 그 자체에 있어서 다양한 것을 본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절대자의 자기 구별은 필연적으로 자기 이중화이고, 이 이중화 속에서 절대자는 그 자신의 타자로서 자신에 대립한다. 절대자는 이 타자로서는 세계이고, 세계로서는 다시 인식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에 있어 인식 대상은 단순한 표상 또는 인식하는 자에 의해서 산출된 어떤 것이 아니다. 헤겔은 칸트와 피히테에게서 '주관적 형식'을 보는데, 이처럼 관념이 주관적 형식 속에 있다는 관념론은 헤겔에게서 부정된다. 헤겔에게서 절대자는 "자기의 타자"로서 자기의 대상이다. 또한, 절대자의 자기 인식은 모든 인식 작용의 참된 본질로서 나타난다. 절대정신은 자기의 대상에 대립하면서도 이 대상과 일치한다. 헤겔에 있어 체계의 계획은 체계 속에 내재해 있다. 철학은 "절대정신"을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철학은 절대정신을 이 정신의 이념 속에서, 그것의 이분화 속에서, 그리고 그 자신에로의 복귀 속에서 인식해야 한다.

라인홀트는 "철학의 상태에 대한 보다 용이한 개관을 기고"에서 셸링의 자연철학을 지식학의 단순한 귀결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당시 셸링과 친했던 헤겔은 여기서 뭔가가 곡해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헤겔은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이 과제에 착수했을 때, 탐구를 너무 깊이 밀고 간 나머지, 탐구를 위한 근원적인 목적은 후퇴하고, 오히려 그 자신의 사상이 갑자기 나타나게 된다.

헤겔은 우선 멀리까지 소급해서 고찰한다. "칸트철학은 이 철학의 정신이 그 자구로부터 분리되고, 사변적 원리는 여타의 원리로부터 구별될 필요가 있었다" 피히테는 그 원리(사변적 원리)를 범주의 연역에서 발견했다. 이 원리는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 이었다. 이 동일성 속에 "이성에 의해 명명식이 치러진 오성 이론이 놓여 있다. 그러나 발견된 이 동일성은 칸트에 의하여" 12개 또는 단지 9개의 순수한 사유 능력에 한정되었다. 왜냐하면 양상의 범주는 합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곁에 "감성과 지각의 어마어마한 영역", 즉 "절대적 후천성"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비동일성의 영역"을 말한다. 그 이유는 "이념, 즉 이성의 산물로부터 동일성, 다시 말하면 이성적인 것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립이 도입되었다.

피히테는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을 다시 순수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아=자아"라는 공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부터 연역하게 되자마자 그는 절대자에게는 "순수한 의식의 제약의 형식"을, 그리고 의식에게는 피제약자의 형식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이성은 "오성으로 세력이 약화"된다. (J : 절대자는 제약하고 의식은 피제약자이기 때문에 세력이 약화된다는 뜻인 듯) 이런 가운데 이성은 "절대자가 절대자 자신에게 부여해야 하는 형태의 원리가 되고, 또 이 형태의 학에 대한 원리"가 된다. 이에 대해 헤겔은 피히테 사상의 두 측면을 구별한다. 그 중 하나는 순수한 "이성의 동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의 유한화를 의미하는 이성의 "순수한 의식"(자아)과의 동일화이다. 피히테의 "주관-객관"은 주관적인 것으로 머물고 있고, 이것에 이제 셸링은 "객관적 주관-객관"을 대립시켰다.

피히테의 지식학이 가진 난해성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피히테의 주장처럼 만물이 자아로부터 나온다면 (왜냐하면 자아는 심지어 자기의 비아도 "정립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역시 자아 그 자체의 성격을 보유해야 하고, 그리고 자아에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피히테는 이것을 당위로 끝낸다. 만물은 다만 "마땅히" 자아"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일성은 지양되고 만다 .

 

오성

오성은 자기의 대상을 어떤 외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절대자의 현상은 절대자로부터 고립되고, "그리고 독립적인 것으로서 확정되어" "현상하게 된다". (J : 절대자가 현상하게 되면 그건 이미 일종의 어떤 '고정'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파악이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은 독립적인 것으로 확정되면서 현상되는 것이고, 또 절대자로부터 똑 떨어져 나옴으로써 고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상은 그 원천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다" 또한 "현상은 자신의 한정을 가진 다양성을 하나의 전체로서 구성하려 한다" (J : 절대자가 현상하는 경우, 이 때 현상하는 것은 '다양성'을 갖게 되고, '한정'을 갖게 된다. '다양성'은 말하자면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오성은 이러한 필요를 고려하기 때문에 오성은 이성(즉 절대 이성)을 모방하여 절대적으로 정립하게 되고, (J : 절대적으로 정립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동시에 오성은 이성을 유한화하려 한다. 하지만 오성은 이성을 어떠한 정립 속에서도 포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오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애매한 것, 차별화(J : 차별화=다양성 으로 봐도 될 듯) 에 앞서는 통일성으로서, 시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화가 존재와 의식, 자연과 정신으로서의 이분화인 한에서, 산물로서의 오성은 오성 자신이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왜냐햐면 바로 이 의식이 오성을, 의식이 그 속에 존립하고 있는 대립을 통해서, 존재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오성은 이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으므로 이성으로 전진해가야 한다. 이처럼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철학의 요구"이다. 이성을 이 이ㅓㅅㅇ의 대립 속에서 재인식할 적에 비로소 이 요구는 실현된다. "철학의 과제는 이 전제들을 합일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존재를 비존재 속으로 – 생성으로서, 이분화를 절대자 속으로 – 절대자의 현상으로서, 유한자를 무한자 속으로 – 생명으로서 정립하는 데에 있다."

철학의 도구는 "반성"이다. 이 반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오성이 행하는 일은 오성에 대해서 어떤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는 일이다. 따라서 이 오성이 행하는 것은 "정립하는 일"이다. 하지만 반성은 자기의 대상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 지양 때문이다. "절대자는 마땅히 반성되고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자는 정립되는 것이 아니고 지양되어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정립되면서 제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되면 절대자는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반성은 절대자를 폐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반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폐기하고, 동시에 "모든 존재와 제한된 것들"(즉 반성이 절대자를 정립했던 것들) 을 폐기한다. 그리하여 반성은 새로운 정립에로 전진하게 되고, 이 정립은 다시 똑같이 지양된다. 이 과정은 하나의 진보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절대적 동일성에 이르기까지 안내해가는 것이다. 오성이 어떤 단계 또는 어떤 정립된 것에 고정되자마자 오성은 대립과 유한성 속에 머물게 된다. 오성은 그때그때의 것만을 보고 전체를 개관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성은 오성의 비밀을 간파하고, 오성의 정립을 부정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오성 자체를 지양할 수 있다. 이 지양은 유한한 오성 속에서 행하는 절대자의 돌파 작용이다. "유한자의 능력으로서의 반성과 이 반성에 대립된 무한자는 이성 속에 종합되어 있고, 이성의 무한성은 유한자를 자신 속에 포괄한다."

반성에 대해서는 절대적 출발점이 있다는 것이 지식학의 토대이다. 피히테는 이 출발점을 하나의 원칙으로 공식화한다. 이 원칙은 정립의 형식을 갖고 있고, 그렇게 됨으로써 원칙은 오히려 반성의 산물이 된다. (J : 정립의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반성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따라서 원칙은 반성을 위한 반성의 정립이다. "사유된 것은 어떤 대립된 것에 의해서 제약되는 것이고, 따라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의 원칙으로부터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성은 단초와 종말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단초이건, 그것은 이미 매개된 것이고, 모든 종말은 더 이상의 것의 매개이다. 체계를 위해서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쉬운 일은 "망상" 속에 있다. 그리고 망상은 법칙으로서의 법칙이 이율배반적인 것으로서 증명되기 때문에 보복을 받는다" (J : 이것은 헤겔의 말임)

이러한 사태는 피히테의 이론으로도 증명 가능하다. 둘 째 원칙은 명백히 첫 째 원칙의 제약이라고 하는 요구와 함께 등장하고, 따라서 첫 째 원칙과 똑같이 무제약적이다. 그와 동시에 첫 째 원칙은 적어도 그것이 첫 째 원칙이라고 하는 그 요구 속에서 이미 이분화하여 이율배반에 빠진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이율배반의 계열은 그 진행을 멈출 수 없다. 피히테의 변증법은 이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피히테의 변증법이 매우 철저히 전진하여 그 단초의 절대성을 지양한다면, (J : 이 말은 곧 실제 피히테의 경우 변증법을 철저히 전진시키지 못했고, 단초의 절대성을 지양하지 못했다는 뜻? 즉, 지식학은 절대적 출발점을 하나의 원칙으로 가정함으로써, 단초의 절대성을 지양하지 못했다는 것?) 이 변등법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됨으로써 변증법은 그 자체를 지양할 뿐만 아니라 – 이것은 변증법의 본질 속에 놓여 있다 – 배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립된 단초 저 너머로 연장하고, 이 단초를 상대적인 것으로서 꿰뚫어 보며, 그리하여 의식과 이 의식의 영원한 유한성을 넘어 절대자에 이르기까지 꿰뚫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필연적으로 정립된 단초의 피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절대자는 단순히 결국에 가서 그렇게 결과로 생겨난다는 그런 것은 아니다. 철학은 동시에 철학 그 자신과 그 대상의 지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피히테의 요구이기도 하다.

 

'자연과 의식의 대립'에서 '절대자의 선험적 직관 속으로의 이행'으로

이러한 통찰에서 밝혀지는 긍정적인 것은 헤겔이 "선험적 직관"이라고 부른 것이다. 셸링은 그것을 지적 직관이라고 불렀다. 헤겔이 "선험적"이라는 말로 의미하고자 한 것은 이런 것이다. 동일자의 직관이 있고, 이 직관 속에서 주관과 객관이 지양되어 있는 것.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도 여전히 절대자와 현상이 대립되어 있다면, 이 대립도 역시 동일성으로서 "선험적"으로 직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단적 체계에서와 같이 절대자를 현상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속에서 현상하는 것 그 자체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 직관 속에서 정립된 것은 지양되고, 절대자는 일체의 반성에 앞서서 파악된다.

그런데 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현상 형식, 그리고 동시에 이 현상 형식이 전개해야 하는 철학 분과의 내용적인 배치에 관한 문제다. 즉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자연과 의식(정신)에 관한 학문의 내용적인 배치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은 이질적인 대립처럼 서로 맞서는 것도 아니고, 스피노자의 연장과 사유처럼 평행하는 것도 아니다. 이 양자의 연관은 공통적인 원천 속에서만 놓여 있을 필요는 없다. (J : 즉 같은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물 같은 개념은 아니라는 것?) 이 연관은 이 양자에 내적으로도 결부되어 있어야 하고, 또 내용상으로도 이 양자 속에서 명백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측면은 우리가 이 양자를 실제로 하나의 세계 속에서 원래 공존하는 것으로서, 전체의 성원으로서, 즉 일관된 유일한 단계 연관(이 연관 속에 자연으로부터 정신으로의 이행이 있다)의 단편으로서 이해할 때만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스피노자적 배열이 라이프니츠적 배열에 의해 교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영원한 맞상대로 존속하는 병렬접속은 과정이 그 속에서 통일되어 있는 직렬접속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절대자는 양자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고, 학문들 자체는 관념적인 대립이 아니라, 실재적인 대립이다. 따라서 이 학문들은 동시에 하나의 연속성 속에서 하나의 연관되는 학문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여기서 절대자는 동일성의 체계에 따라서 무관심적 중간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속에서 비로소 전개된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두 학문은 동일성이 총체성으로 전개하거나 또는 자기를 구성해 가는 진행으로서 현상한다."

동일철학의 내부에서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의식의 대립성에 있어서의 동질적 통일이다. 세계의 다양성은 이원적으로 분해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은 의식의 저 아득한 아래쪽에서 일어나고, 의식의 단계들은 그 쪽에서 보면 자연의 단계들과 똑같이 절대적 이성이 아니다. 자연과 의식이라는 두 영역 상호의 한계점은 따라서 실재적인 한계점으로서 함께 계열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한계점은 두 영역 사이에서 분리하는 것인 그만큼 결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의 각성 및 정신의 자각은 자연의 종말이면서 의식의 단초이고, 또 최고의 정점이면서 최초의 싹이며, 동시에 수렴점과 팽창의 토대이기도 하다. 자연과 의식, 이 두 영역의 "모든"단계를 거쳐 통과하는 것이 이성 자체이고, 또 절대정신인 한에서 이행점은 일체를 결합하는 중심적인 절대자의 현상 형식이다. 자기의 대상을 절대자 속에서 논급하는 두 학문(J : 자연의 학문과 의식의 학문?)에서 이 이행점은 동시에 내재적이기도 하고, 피안적이기도 한 점이다. 절대자 안에서는 이 두 학문이 "선험적 직관" 속으로 이행한다.

헤겔은 자신의 처녀작에서 바르딜리를 인용하고 있는데, 바르딜리의 해석가로서 우쭐거렸던 라인홀트는 "최초의 개념적 진리"에 대립하는 어떤 "근원적 진리"가 의식의 피안에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헤겔은 여기에 사태가 훼손돼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인식 바깥에 있는 진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라인홀트는 바르딜리의 "제 일 논리학 개요"에 나타난 내용, 즉 '사유에 의해서 비로소 폐기되어야 할 "물질성"'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다. 하지만 헤겔은 바르딜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바르딜리의 개요에 의하면 이 물질성 곁에 "사유를 통해서 여전히 폐기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형식은 형식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사유의 형식이 따라야 하는 사유에서 독립해 있는 형식"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J : 즉, 바르딜리에 따르면 사유의 형식과 자연의 형식이 있으며, 이 두 형식은 상호간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헤겔은 "자연의 법칙"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바르딜리의 "개요"의 핵심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핵심점에 의하면 "사유로서의 사유"는 인간의 사유 형식의 법칙성일 뿐만 아니라,, 자연 형식의 법칙성이고, 그리고 순수 논리학은 동시에 모든 존재자의 논리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헤겔은 바르딜리가 동일성의 철학에 접근해 있으면서 동시에 이 동일성의 철학을 초월해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다. 즉 논리적인 것 그 자체가 모든 사물의 원근거에로 확장되고, 그리하여 실로 논리학이 사실상 절대자에 관한 학문으로 된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라인홀트는 철학의 반성 형식을 체계의 본질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바르딜리의 논리학에서 어떤 체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사태 자체를 "철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초경향"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헤겔 자신의 근본 경향이 된다. 또한 그가 끈질기게 주장하는 것은 전체 속에서 이 근본 경향의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는 일, 말하자면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이라는 서로 다른 두 학문의 근본 경향의 근본적 위치를 부여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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