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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글들/[독일 관념론 정리]

J : [독일 관념론] 513~526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3. 15.

2. 정신 현상학의 과제와 구도

논리학은 헤겔이 구상한 체계의 단초에 서 있지만, 그러나 철학적 의식의 관계에서는 동시에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단계이다. 논리학의 대상인 절대자는 자기 자신을 꿰뚫고 들어가는 정신의 최후 단계에서 비로소 그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이 의식은 따라서 보다 낮은 의식의 단계들을 이미 자기 배후에 갖고 있다. 그런데 <현상학>은 의식을 그것의 최고의 단계 – 즉 논리학의 출발점 – 에 이르기까지 추구해 올라가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현상학은 이렇게 중간에서 시작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 그 자체가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의 직접적인 것"(소여)으로서 발견하는 바로 그것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소박한 인간으로서 반성하기 시작할 때, 자신을 중간에 서 있는 존재로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헤겔 또한 피히테처럼 자아에 관한 철학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걷는 길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피히테의 제1지식학에서 자아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다룬다. 그리하여 처음에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감각하고, 그리고 나서 이 감각된 것을 직관하며, 이 직관 작용을 표상하고, 그리고 그의 표상 작용을 인지한다. 자아는 언제나 다만 자기 자신과 자기의 성찰만을 반성하고, 반성하면서 언제나 더 나아가서 자신의 주위를 회전하며, 자기의 이 회전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자아는 그것이 원칙적으로 자신 속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객관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헤겔에 있어 자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주관은 이 주관이 행하는 것 속에서 묘사되는 것이 아니다. 주관은 주관이 자신에 관해서 아는 것 (즉 주관에게 그 자신에 관해서 주어진 것) 속에서 묘사된다. 그러나 주관에게는 그의 객관만이 주어질 뿐이다. 이 객관은 여러 단계에서 매우 다양하게 주어진다. 주관은 자신을 자세히 음미하면서 한 단계씩 고양되는 사이에 비로소 자기 직관에 이른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주관의 자기 인식은 대자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에 대한 전진적인 인식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

주관을 인식하게 되는 어떤 "객관적인"길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주관과 객관을 통일시키는 동일성의 명제를 근거로 해서 비로소 발견될 수 있었다. 피히테나 셸링은 이 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셸링은 동일성의 명제를 갖고 있었으나 이 길을 찾지 못했다. 이 길은 의식이 자기의 대상을 그 변화 속에서 파악함을 통해 의식이 자기를 파악하게 되는 길이다. 이 길은 지식학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 이 길의 비밀은 이렇다. 객관의 현상 형식은 동시에 주관의 현상 형식이라는 것. 주관은 자기의 객관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도 변화한다는 "경험을 한다". 변화를 추적하는 철학자는 주관의 이 "경험"에서 이 경험에 관한 지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더 첨가시킬 필요가 없다. 여기서 철학자는 이미 보편적인 경험론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의 경험은 자연의 지에 제한된 칸트적 의미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이 자기의 객관과 함께 이루는 일체의 경험의 이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 현상학은 보편적, 즉 사물의 인식에 제한되지 않은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신 현상학은 어떤 의미에서 경험의 이론이다.

피히테도 역시 자아는 자기 자신과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자아는 자기 자신을 주시한다"고. 그러나 그는 이 사상을 충분히 활용할 줄은 몰랐다. 그는 자아가 "대자적"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자아의 본질로부터 추론하고, 도출하고, 연역했다. 결과로서 나타날 자아의 절대적 대자 존재는 그에게 이미 확립되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아의 고유한 본질에 무리를 가하고 있다. 그는 자아를 그 현상 형식 속에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아가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되는 그대로도 아니다.

그러나 헤겔에게서는 다르다. 그는 결코 연역하지 않는다. 결과는 선취된 것이 아니고, 자기의식은 전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주관이 "경험하는" 것, 주관에게 주어진 것에 철저히 의존하고, 그것이 어떻게 현시되는가에 의존한다. 이처럼 그는 주관으로부터도, 객관으로부터도 어떤 것도 도출하지 않는다. 그는 현상을 단계적으로 발견하는 대로 단순히 이 현상들을 기술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엄격하게 분절된 단계들의 연속을 드러낸다면, 이 연속은 그 때문에도 연역이 아니다. 이 연속은 오히려 그 자체 현상에 속하고 또 현상에서 전진하면서 함께 드러나는 발견된 어떤 것이다. 이 연속이 자기의식에로 안내해 간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이 연속 그 자체의 성질 속에 놓여 있는 것이고, 선행이라는 조치의 방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J : 이 연속이 어째서 작위적인 것이 아니지? 오히려 불연속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자신에로 밀고 들어가는 일은 각각의 의식의 단계에서는 우선 개별적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의식의 각 단계가 그 자체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객관을 처리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내면으로부터 자신을 넘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현상에는 물론 "참되지 못한 지"도 속한다. 그런데 이 참되지 못한 지는 가상이다. 그러나 학문은 이 가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학문에 대한 어떠한 단언도, 보다 나은 것에 대한 어떠한 예감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오로지 현상 자체 속에서 가상과 존재를 구별하도록 가르치는 철저한 선행 조치만이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런데 이 선행 조치는 다시 학문이 현상 형식 그 자체를 알고 이해하게 될 때에만 획득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현상하는 지의 서술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자기의 결함과 오류를 갖고 있으면서, 그러나 동시에 이 오류를 극복하는 힘 있는 수단도 갖고 있는 그러한 현상하는 지의 서술이 시작돼야 하는 것이다.

현상하는 지는 따라서 아직도 진정한 지가 아니다. 그것은 잘 숙지된 것이지만, "숙지된 것은, 그것이 숙지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된 것이 아니다." 현상하는 지를 진정한 지로 간주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현상하는 지와 진정한 지의 구별은 바깥으로부터 들어와서는 안된다. 이 구별은 현상하는 지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자기의 대상의 변화에 대한 의식에 귀를 기울여서 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참되지 못한 지의 모든 정정은 각기 이미 지의 새로운 현상 형식으로 되기 때문이다. 현상하는 지에 관한 학문은, 어떤 예비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하고, 이 예비적인 것의 결과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의 특유한 형태 속에서 움직이는 학문"이 등장한다. 이 학문은 참된 지에로 밀고 들어가는 자연적 의식의 길이다. 또한 본성상 자신에게 미리 정해진 단계들로서의 자신의 형태화의 계열을 관통하는 영혼의 길이다.

자연적 의식이 진행하는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순수 지는 언제나 추후에 생기는 산물인 것이고, 이때 그것은 언제나 아래 단계를 이미 통과해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과를 하는 것과 통과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러한 통과, 즉 "형태화의 계열"은 비로소 특수한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학문이 바로 정신 현상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피히테의 연역적 변증법을 떠올리다 보면, 우리는 이 변증법이라는 것이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헤겔의 가르침은 이렇다. 즉 변증법은 바로 의식이 그 자신과 더불어 행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변증법은 밖으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철학적 고찰의 한 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변증법은 형태화 그 자체의 계열에 있어서 의식이 이 형태화를 통해서 이루는 운동으로서 발견되는 것이다. 철학적 고찰은 이 운동을 따르면서, 비로소 이 운동을 함께 행하는 곳에 이르고, 이 운동을 함께 달리면서 함께 행할 뿐 아니라, 의식 속으로 높이는 그곳에 이른다.

현상학에 있어서는 의식이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 때문에, 현상학에서는 의식이 그 자신에 있어서 실행하는 "운동"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의식 자신은 다시 어떤 대상의 지인 한, 의식은 이 운동을 필연적으로 이중적인 운동으로서, 즉 "자기의 지에 있어서도, 그리고 자기의 대상에 있어서도" 실행한다. 요컨대 "경험"이라는 것은, 바로 의식이 이 운동 속에서 새로운 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의식에게 새로운 참된 대상이 이 운동으로부터 생겨나는" 운동이다. 의식이 대상을 향해 있으면서 그 자신이 변하는 동안에 이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의식이 그 자신에 있어서 행하는 경험인 것이다. 정신 현상학은 이 경험에 관한 지이다. 여기서 현상학은 이 법칙을 준수하면서, 그 자신 이 법칙의 형식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의식의 변증법은 현상학에서 철학적 지의 변증법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일 때문에 이 변증법이 마치 철학자에 의해서 도입되고 또 의식의 단계에 대해서 강요되는 듯한 편견을 갖게 한다. 현상학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며, 현상학의 본질은 언제나 사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비로소 방법에로 옮겨진다는 것을 현상학에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헤겔이 이 방법의 거장이 된 것은 그의 방법 의식 때문이 아니고, 사실에 대한 그의 특유한 몰두, 말하자면 사실 속으로의 그 자신의 소실 때문이다. 이 몰두의 형식이 변증법이다.

의식의 과정이 경험 가능한 어떤 것, 즉 의식 그 자체가 경험하는 어떤 것이라면, 이 과정은 정말 더더욱 의식의 존재 방식 속에 존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의식의 과정은 이와 같이 존립하는 것으로서만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 "자기의 계기들을 생산하는"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생산 작용을 철학적 사유에 의한 구성으로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적 의식의 길" 위에서 자기 전개로서의 생산 작용이다. 이것은 또한 사유 관념론이 이해하는 것과 같은 생산, 즉 의식으로"부터의" 대상의 생산으로서가 아니라, 대상의 현상 형식에 있어서 전진하는 의식의 경험으로서의 생산 작용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형이상학은 절대자의 개념 속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절대자란, 한 걸음 앞으로 밀고 들어가는 그 자신의 자기파악이, 본래는 경험의 과정의 배후에서 실재적 과정을 형성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도 이 실재 과정은 전혀 전제되어 있지 않다. 의식의 현상학이 이 실재 과정에로 처음으로 안내해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의식의 현상학은 명확하게 오로지 이차적인 과정, 비형이상학적 과정, 즉 – 지의 형태화에 있어서 의식의 자기 경험을 형성하는 – 현상하는 과정에 서 있다. 논리학에 가서야 비로소 기저에 놓여 있는 저 다른 종류의 실재 과정을 다룬다. "현상하는 지에 관한 학문" 즉 정신현상학이 비로소 그곳에 이르는 길을 터준다. 그리고 이 길은 경험의 길인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인식의 실재성의 검사"를 위한 "척도"가 어디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척도는 인식되는 것의 "즉자태"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이 즉자태의 절대적 인식을 이미 전제하게 될 것이다. (J : 뭔말임?) 그런데 이 현상학이 이제 참과 거짓을 결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갖고서 등장한다면, 이 학문은 감히 그 자신이 척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학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곳에서는 이 현상학 그 자체도, 그 어떤 것도 본질로서 또는 즉자태로서 정당화되지 않고 있으며, 그런데 그와 같은 즉자태 없이는 어떠한 검사도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존재하므로 이 모순의 제거는 직접적으로 변증법적 경험의 조직 안내된다. 이 모순의 제거는 철학자가 사실의 본질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경험하는" 최초의 것이다. 주요점은 즉자 존재와 우리에 대한 존재와의 구별이다. 대상은 모든 지 속에서 즉자 존재도 우리들에 대한(지에 대한) 존재도 갖고 있다. 그런데 지의 진리는 전자와 후자의 일치를 본질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를 그것의 진리를 근거로 삼고 연구한다면, 지 그 자체가 즉자적으로 무엇인가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지는 대상으로서는 오히려 즉자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과가 일어난다. 즉 지의 즉자 존재는 그 자체 "우리들에 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의 본질이라고 간주했던 것은 "다만 지에 관한 우리들의 지"인 것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이 "다만"은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것을 적극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지 그 자신의 지, 즉 지와 무지의 지라는 지의 본질 속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척도는 우리 속에 떨어진다" 이것은 척도의 약점이나 주관성을 의미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의식의 강점과 객관성을 의마할 수도 있다.

모든 지가 당장 자기의 진리의 표준을 자신 속에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지는 대상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검증하는 동인을 갖는다. 지는 이러한 일을 그때그때의 지의 현상 형식을 초월하면서 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지는 그 자신의 그때그때의 현상 형식을 넘어선다. 헤겔은 이 사정을, 과정에서 나타날 계기를 아직도 이끌어 들이는 일이 없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의식은 자기의 척도를 자기 자신에게 준다. 그 때문에 연구라는 것은 자기의 자기 자신과의 비교인 것이다. 왜냐하면 방금 생긴 구별 (즉 지의 즉자태와 우리들에 대한 상태의 구별)은 의식 속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의식 속에서 일자는 타자에 대하여 있다. 또는 의식은 일반적으로 지의 계기의 규정성을 자기 속에 갖고 있다. 동시에 이 타자는 의식한테서는 의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 관계 바깥에서 또는 즉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의식이 자신의 내부에서 즉자태 또는 진리라고 선언하는 것에서 우리는 의식이 자기의 지를 측량하도록 내세우는 척도를 갖는다"

따라서 의식이 검사의 척도를 그 자신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이 관계의 두 측면, 즉 지와 존재자, 개념과 대상, 그리고 이 두 측면의 그 상호에 대한 존재와 즉자 존재를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이와 동시에 이제 "우리들에 의한 첨가는 불필요하게 된다" 우리는 척도를 위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밖에 우리는 검사 그 자체로부터 해방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의식은 자기 자신을 검사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측면에서 다만 순수한 주시만이 남는다"

현상하는 지는 그 자체가 비교하는 일을 행하고, 척도를 제공하며, 척도를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척도는 현상하는 지에 있어서는 보통 사용할 적에 비로소 발생한다. 그러나 철학적 지는 척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척도는 어떤 가변적인 것으로서 증명되고, 그 자체가 단계의 진행에 따라서 전진한다. 다시 말하면 비교하는 경우에 일치하지 않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의식은 대상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지를 변경시켜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가 변경하는 경우에 이 지한테서는 사실상 대상 자체도 변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지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관한 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와 더불어 대상 역시 다른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에 속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대체 대상이 어떻게 변경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즉자태와 우리들에 대한 상태의 구별 속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의식이 즉자 존재라고 간주했던 그것은 전혀 즉자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들에 대해서만 즉자적으로 존재했음"을 의식은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시작되는 교정의 보편적인 형식, 즉 의식이 적용할 때의 의식에 대한 "척도의" 출현이다. 그 결과로 등장하는 것은 의식을 대상의 진정한 즉자태에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대상은 사실상 어떤 "다른 대상"으로서 명백하게 된다. 헤겔은 이를 보고 대상은 "자신을 지탱하지 못한다"라는 표현으로 특징 짓는다. 그러나 동시에 척도 역시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게 된다. 이 척도는 보편적 척도는 아니고 어떤 규정된 대상의 규정된 지에 대한 매우 특수한 척도였기 때문이다. "척도의 대상이 검사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검사의 척도는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검사는 지의 검사일 뿐만 아니라, 검사의 척도의 검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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