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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글들/[독일 관념론 정리]

[독일 관념론] 441~458p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3. 6.

4. 헤겔과 그의 시대의 철학

 

낭만주의자로서의 헤겔

헤겔은 낭만주의를 넘어서서 발전해 간 사람이다. 낭만주의자들의 힘이 풍부한 상상력과 착상, 그리고 시와 철학 사이의 무경계성에 있었다면, 헤겔의 힘은 냉정하고 엄밀한 규율, 개념적 엄밀성에 있었다. 그렇지만 헤겔을 낭만주의에서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없다. 그의 사유는 일종의 완성에 이르게 되는 낭만주의의 철학적 경향이면서, 동시에 고전적 정신과 낭만적 정신과의 매우 특유한 종합이라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헤겔의 사상은 그 내용적 측면에 있어 어떤 부분에서 낭만주의와 유사함을 가지는가? 낭만주의에서 자주 반복되는 테마는 "유한자 속의 무한자"라는 것, 그리고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자기-재발견"이다. 이 두 가지 근본 사상은 헤겔에서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형태화되고, 객관화되며, 내면화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유일하게 참된 것은 '전체'이고, '절대적 이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명확한 형태로 된' 이성은 아니다. 이성이 명확한 형태로 된다는 것은 이성의 유한화요 제한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각각의 현상 형식 (J:우리가 정신현상학에서 읽었던 정신의 발전 단계들을 이야기하는 듯. 이를테면 지각->자기의식->의식 이 각각의 단계들) 은 단지 진실(J:이 진실은 '절대적 이성'을 말하는 듯)의 부분적 외관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정신 혹은 이성이 스스로를 보완하고 완성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자기 바깥에, 오히려 자기를 넘어서, 보다 높은 단계에서,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또 다시 자신 너머로 내몰리기 때문에, 보다 높은 전체의 연쇄 속에서, 최후에 가서는 절대정신의 자기 파악 속에서 그것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절대자는 어디서나 유한자 속의 무한자인 것이다. (J:이 "절대자는 어디서나 유한자 속의 무한자이다"라는 명제는, 낭만주의의 사상을 많은 부분 따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문장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임. 여기서 '정신의 각각의 현상 형식 = 유한자', '절대정신=무한자'라고 치환시켜서 생각해도 좋을 듯. 내가 이해하기로는, 우리는 정신의 현상형식으로서 부분적인 것들만을 발견하게 되지만, 이미 그것은 끊임 없이 자기고양을 하는 완성에로의 운동을 지향하고 있고, 그런 한에서 그것 자체가 이미 절대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뭐 이런 의미인 것 같다) 그리하여 각각의 존재 단계(J : 각각의 존재 단계 = 각각의 현상 형식)는, 그것이 자기의 참된 본질로 밀고 들어간다면, 각각의 다른 단계에서 자기를 재인식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각각의 존재 단계는, 그것의 단순한 즉자 존재가 대자 존재로 전진해야 하는 한에서, 자기의 참된 본질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 '대자 존재'는 바로 각 단계 자신의 자기 파악인 것이고, 이 자기 파악은 현상 방식에 밀착된 것이 아니라, 본질에 밀착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

자연이란 철저히 정신 그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은 "정신의 자기 외재적 존재"이고, "타재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이념"이다. 그리고 자연 그 자신은 이 타재의 형식 속에서 외면적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 속에서 자신에 도달한 '자각적 정신'이 자연 속의 "자기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을 본다면, 물론 이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정신은 자신을 바로 "자신의 외부에서" 존재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헤겔은 여기서 이러한 사태를 한층 더 뛰어넘어 전진한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서는 근본적으로 그 어느 곳에서도 자기의 이성에 의해서 이성을, 그리고 자기의 정신에 의해서 정신을 볼 수 없다. 모든 상대적인 것 속에는 동일한 절대자가, 모든 유한성 속에는 동일한 무한자가 존재한다. 여기서 노발리스와 헤겔 사이의 의견 차이를 관찰할 수 있다. 노발리스에 따르면 자연 속에서 무한한 것이 인간 속에서는 유한화되어 현상하는 것으로 된다. 반면 헤겔에서는 양자, 즉 인간과 자연은 제한된 단계이지만,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절대자에 보다 더 가까이 서 있고, 원리적으로 절대자에로 고양될 수 있다. 따라서 헤겔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에 비하여 보다 좁고, 보다 종속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이처럼 강조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짐에 따라 헤겔의 낭만주의적 색체는 더욱 더 강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런 점에서 우리는 헤겔의 사상 속에서 낭만주의가 철학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피히테에 대한 헤겔의 관계

피히테와 헤겔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피히테의 경우 의식에 대해서 가졌던 관점이 일면적이었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자신의 '지식학'에서 자연법, 윤리학, 교육학, 역사, 국가, 종교라는 주제를 통해 어떤 객관적 정신에 관한 이론을 만들기를 원했다. 헤겔은 자신의 '정신 현상학'에서 이러한 과제를 완수하고자 했다. 다만 차이는, 지식학의 경우 연역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고, 정신 현상학의 경우 기술적인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기본 사상은, 정신적 존재는 주관 속에서뿐만 아니라, 주관을 초월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자아가 자신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 즉 "대자적"인 측면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피히테는 '대자 존재'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이용하지는 않는다. 피히테는 이 개념을 정신의 초주관적 본질에는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신의 초주관적 본질의 확고한 윤곽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헤겔에게서는 이 윤곽이 마치 자명한 듯이 나타난다 .이런 측면은 다른 많은 개념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피히테는 개념들을 손 안에 넣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사용할 줄은 모른다. 피히테로 하여금 이 개념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연역의 도식, 그의 변증법의 부자유성, 그리고 여러가지 영역에 흩어져 있는 변증법의 연구 방식 등이다. 물론 피히테의 이론에서도 여전히 변증법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현존하고 있고, 또 사변적 사유의 자아-초월적 의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피히테에게서도 철학은 결코 의식의 관점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순수 이성 자체"의 관점으로부터만 논구될 수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피히테와 헤겔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위'에 대한 입장 차이다 .피히테는 실천적 자아를 이론적 자아의 전제로 삼았고 (J : 즉 실천적 자아가 더 중요하다는 뜻?), 또 당위를 존재의 상위에 두었다. (J : 즉 당위가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피히테에게 있어 행위라는 것은 이 행위가 "목표로서 지향하는" 그 어떤 것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이 세계가 당연히 그렇게 존재해서는 안 되는 대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행위가 이 세계를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대로 개조하게 된다. (J : 정리하자면, 이 세계는 잘못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때 행위가 목표로서 지향해야 할 이상같은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세계는 그것이 존재되어야 하는 형태로 개조된다는 의미인가?) 이러한 이론의 단순화에 의해 피히테의 사상은 어떤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겔은 이것에 반대한다. 헤겔에 따르면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실로 완전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는 완전성에 이르는 단계이기 때문에 이미 그 자체의 의미가 실현된 것이다. 당위의 관점에서 세계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인간의 기만적 월권이요, 절대적 이성에 대한 유한한 이성의 교만이다. 헤겔에 따르면 당위가 지니고 있는 그 정당한 의미는 당위가 사실상으로 실현되어 있지 않은 그러한 존재의 유한성에 제한되어 있다. (J : 이미 당위를 실현하고 난 완전한 존재에게는 당위라는 것이 의미가 없으며, 당위란 그것을 아직 실현하지 않은 유한한 존재에게나 의미가 있다는 뜻) 이에 반하여 세계는 이러한 존재(J : 이러한 존재=유한한 존재)에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결국 말하자면 당위란 오히려 절대적 이성에 대해서 유한한 이성이 갖는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성이 모든 사물 속의 기본 본질이고, 이성이 모든 것 속에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것"이라면, 사실 세계 과정은 올바른 길 위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고, 선의 실현은 걱정 없도록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관여가 배제되어 있을 그러한 방식에서가 아니다. 즉, 세계 과정의 진행에서 인간은 배제되어 있지 않다. 보다 높은 존재 형식은 인간의 존재에 결부되어 있고, 인간이 담지하고 있는 의식과 정신에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실로 핵심적인 것은 인간이고, 또 이념에 이르는 인간의 지위이다. 따라서 당위에는 인간의 의의가 지속한다. 그러나 "최후의 것과 참된 것"은 역시 여기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당위가 실현된다는 보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위 그 자체의 의미는 당위의 실현에 있다. 그리고 이 실현은 당위의 지양이다. (J : 빵에 대한 욕망은 빵의 지양 즉 빵을 먹어서 없앰으로써 가능해지듯이, 당위의 지양을 통해 당위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따러서 당위의 고유한 본질은 당위 그 자체를 폐기시키고, 완성에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히테가 의욕 했던 것처럼 영속하는,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한 "영원한" 당위로서 존속하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J : 피히테에게 있어서 당위란 '지양'이라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가보다. 즉, 당위란 항상 어떤 이상향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도 헤겔 사상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헤겔은 일면적으로 첨예화된 피히테의 사상을 지양하면서, 이 사상을 폐기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기초에 놓인 보다 위대하고 중심적인 개념 속으로 받아들인다.

 

셸링과 헤겔의 관계

우리는 여기서 피히테의 결함으로부터 어떻게 셸링의 자연철학이 생겨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히테는 자아로부터 출발했을 뿐 아니라 자아에 머물러 버렸다. 그에게는 에토스와 자유가 중요한 문제였고 우주와 자연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정신의 토대로부터 자기의식에 이르는 과정을 의식의 단계로서 전개시켰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는 어떻게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물 및 사건들의 세계 속으로 옮겨져서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셸링은 자연을 의식 및 의식의 발전 단계 "앞에" 갖다 놓음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한다. 즉, 셸링에게 의식("자야")은 이미 최초의 것이 아니다. 의식은 보다 더 큰 형식의 발전 과정 한가운데에서 출현한다. 의식은 이 발전 과정 내부에서 형태없는 물질로부터 기계적, 화학적, 식물적, 동물적 형성물을 넘어서 의식에로 솟아오르게 된 단계 계열의 속행일 뿐이다. 왜냐햐면 의식의 "앞에"는 "무의식적 정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J : 좀 거칠게 말하자면, 의식이라는 게 없는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오고, 원시적 생물에서 의식을 가진 생명체가 도래했다 뭐 이런 뉘앙스임) 셸링은 '그 자신이 의식됨으로써 인간의 정신이 되는' 정신과 '무의식적' 정신을 철저히 동일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순수한 "지성"으로서의 정신은 의식 없이도 존립할 수 있다. 헤겔은 셸링의 이 사상을 받아들여 "정신의 자기 외재적 존재"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즉, 우주의 단계 영역 및 이 영역에 속하는 부문에 대한 셸링의 이 구분을 헤겔은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단계 영역의 단초와 근원에 관해서는 헤겔과 셸링의 의견이 갈린다. 셸링은 "절대자"라는 총괄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명백하지 않은 개념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셸링의 동일철학에서 절대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무차별"로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절대자는 또한 "절대적 이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무차별자가 어떻게 차별지워지며, 또 어떻게 자연의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는지를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다. 사실 절대적으로 구별 없는 통일성에서 다양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모든 형이상학적 절대적 일원론이 가진 공통적인 한계다. (J : 우리가 서양고대철학에서 배웠듯이, 통일을 이야기하는 철학은 항상 거기서 어떻게 다양함을 끌어오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난점을 안고 있다) 즉 일자 자체는 다수를 낳을 수 없는 것이고, 만일 다수를 낳을 수 있다면 일자는 이미 다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엄밀한 일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셸링은 이 난점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셸링은 절대자에 관한 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지적 직관'에 의해 파악하려 함으로써 이 난점을 피해갔다.

 

절대자를 파악하기 위해 개념을 끌어들이는 헤겔

이 지점에서 헤겔의 논리학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절대자를 "개념적으로 파악" 하거나 혹은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이것을 포기할 수 없다. 아니,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 말은 곧 "개념 파악적 사유"가 지적 직관의 자리를 차지해야한다는 뜻이다. 절대자를 "예감과 열광이라는 무방도"에 맡기는 것은 사유의 태만을 의미하며, 사유의 고유한 사명을 단명하는 일이다. 지적 직관이 설정하는 절대자라는 꾸밈없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고, 규정성을 갖지 않은 무정형의 실재다. 따라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러한 절대자에게서 아무 것도 "파악"되지 않는 다 해도 사실 하등 놀랄 것이 없다. 절대자 자체가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는 한, 다른 어떤 것도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절대자의 규정성 속으로 파고들어서, 이 규정성을 분리하여 보고, 이것을 이미 절대자 속에 포함된 절대자 고유의 다양성으로 파악하기만 하면, 절대자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절대자'라는 것의 정체에 대해 헤겔은 매우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

"최초에, 그리고 직접적으로 언표되는 그대로의 단초, 원리 또는 절대자는 단지 보편자일 뿐이다. 내가 모든 동물이라고 말할 때 이 낱말이 동물학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신적인 것, 절대자, 영원한 것 등의 낱말들이 이 말 속에 포함된 것을 언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낱말들은 다만 직접적인 것으로서의 직관을 표현할 뿐이다. 그와 같은 낱말 이상의 것, 그리고 단지 하나의 명제에로만이라도 이행하는 것은 철회되어야 할 타자 됨을 포함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은 매개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과제는 술어들을 발전시켜서 절대자의 개념을 절대자의 추상성으로부터 구해 내고, 절대자한테서 그것의 참되고 살아 있는 본질을 알아보는 일, 즉 절대자의 범주의 체계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사변적 명제"의 의미다. 즉 우선 술어는 주어가 무엇인지 폭로한다. 스피노자도 비슷한 관점을 나타낸다. "신이라는 말 자체는 의미 없는 소리이고, 한갓된 이름일 뿐이다. 술어가 비로소 신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며, 또 이 술어가 신의 내용을 충만시켜 주는 신의 의미인 것이다. 공허한 단초는 이러한 종말에 있어서만 현실적인 지()로 된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자의 술어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이 직접적인 것을 그것의 '매개 속에서 비로소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직접적인 것을 그 자체가 내면적으로 깨우쳐지도록 해야 하며, "자신을 자신 속에서", 즉 그것의 규정에 있어서 "반성"토록 해야 한다. "자기 내 반성"은 직접적인 것의 자기 투시이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절대자의 내적 다양성을 볼 수 있게 되거니와, 사상은 비로소 이 다양성을 차례에 따라 방법적 운동에 있어서 편력할 수 있게 된다. 이 매개는 전체적 체계에로, 하나의 특수한 학문으로, 즉 "논리학"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자의 본래적 개념은 결국 이러한 편력의 종말에 가서 비로소 설명되고 깊이 사유된 개념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본래적 개념은 단초에는 전혀 선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선취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실제로는 이 개념이 "정립"되었던 단초에는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파악되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헤겔의 다음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지()는 학문 또는 체계로서만 현실적인 것이고 또 서술될 수 있다". (J : 즉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직관에 따라 절대자를 '선취'한다. 그리고 나서 학문과 체계를 통해 그것을 "자기 자체의 내재적 운동"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전개시키도록 한다. 그리고 그 운동의 종국에 가서 우리는 그 절대자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절대자에 관한 학문은 절대자를 단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밀고 나아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절대자의 학문은 지적 직관이 선취하기만 할 뿐, 보지는 못하는 것을 이렇게 비로소 볼 수 있게 하면서 이 직관을 기본 개념의 변증법 속으로 해소시킨다.

"자기 내 반성" 및 "직접적인 것의 매개"와 같은 난해한 개념들이 여기에서 해명될 수 있다. 절대자와 상대적인 것의 관계도 여기서 이해될 수 있다. 절대자와 상대적인 것 두 양자의 대립이 지양됨으로써 일체의 상대적인 것은 절대자 속으로 받아들여져 총체적 상태를 이룬다. 양자의 관계는 이제 전체와 부분의 관계이고, 또 체계와 그 구성요소의 관계이다. 상대적인 것은 그 총체성에서 보면 그 자체 절대자이다. 술어들의 총괄은 그 자체가 주어 – 즉 주어의 참된 실질 – 이다. 변증법적으로 전개된 범주들의 계열은 결코 실체의 우유적 속성들의 계열이 아니고, 실체 그 자체이다. 헤겔에 따르면 "진리는 전체이다. 그러나 전체는 다만 자기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된 본질일 뿐이다 .절대자에 관해서는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결과이고, 절대자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현실적인 것, 주체 또는 자기 자신으로 생성됨이라고 하는 절대자의 본성이 존립하게 된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도 역시 그것의 존재 단계들의 전체성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세계가 우리들 자신 속에서 파악되기 이전에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한에서 세계 속에서도 역시 절대자는 결과 속에서 비로소 현존하게 되고, 그리고 또한 세계 속에서 진리는 전체로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절대자에 대한 셸링, 피히테와 헤겔의 입장 차이

피히테는 의식의 단계들을 의식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부동浮動(=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임)하는 것으로서 전개하였다. 셸링은 의식의 단계 이전에 무의식적인 것의 단계 계열, 즉 자연의 형식들의 계열을 정립하였으나, 여전히 절대자를 자연의 형식 이전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억류하고 있었다. 헤겔은 여기서 이 절대자로부터 자연과 정신이 어떻게 출현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절대자가 그 자신에 있어서 어떠한 성질의 것이며 또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기다란 계열의 형식들, 즉 절대자의 범주(술어)들이 생긴다. 절대자로부터 절대자의 규정 속에 놓여 있지 않은 어떠한 것도 출현할 수 없다. 자연과 정신의 범주는 이미 그 원범주를 절대자의 범주 속에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그 자체 절대자의 범주이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절대자의 논리 속에서 절대자의 범주를 전개한다면, 우리는 셸링이 피히테의 지식학 앞에 자연철학을 연결시켰던 것 처럼 셸링의 자연철학 앞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갖다붙이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헤겔은 전체의 체계를 조직하기 위해서 이 노선을 뒤로 연장시킨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과 정신이 아직도 분리되지 않은, 따라서 세계가 여전히 통일적으로 존재하는 근본 영역을 얻는다. 셸링이 파악하고자 했지만 헛되게도 부동하는 무차별로 되고 만 주관과 객관의 통일성, 이것은 헤겔에서 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 두드러진 학문으로 전개되게 된다. 그리고 이는 헤겔의 "논리학"에서 이루어진다.

절대자들의 술어들의 총체성은 내용상으로 이해하면 세계, 따라서 자연, 그리고 정신의 총체성 – "사태 그 자체" –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태"는 오히려 사유하는, 그리고 철학하는 이성으로서 우리들 속에서 자기의 "논리"를 갖고 있는 그 이성이고, 또 모든 자연 및 정신의 형식을 통해서 현실화되는 그 이념이며, 변증법적으로 노력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그 사상이기 때문에, 이 학문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의 대립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취되어야 한다. 또한 이 학문에 있어서는 객관과 주관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세계와 세계의식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학문은 모든 즉자 존재자들을 해명한 대자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학문은 존재 형식인데, 거기서는 모든 존재자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면서 대자적으로도 존재하고 있는 그러한 존재 형식인 것이다.

지()의 형상과 질료, 사상과 대상, 지각력과 지각된 것, 세계와 세계의식은 하나로 합일한다. 논리학에 있어서의 이성의 자기 전개는 동시에 우주 속에서의 이성의 자기 전개이다. 논리학의 대상은 모든 사물의 단초이고, 대상에 관한 지()로서의 논리학 자체는 모든 사물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논리학 고유의 대상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은 논리학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과 결합되며 현실화된다. 세계에 대한 지()는 세계의 구성 요소로서 동시에 세계에 귀속한다. 지 속에서 세계는 비로소 완성된다. "논리학은 그리하여 순수 이성의 체계로서, 순수한 사상의 나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나라는 아무 껍질도 갖지 않은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진리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논리학의 이 내용은 신이 자연과 유한한 정신을 창조하기 이전에 자기의 영원한 본질 속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신의 서술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J : 대단하군. 자신의 논리학이 신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뭐 이런 건가?) 이 마지막 말에서 우리는 헤겔이 셸링과 피히테와 달리 신학적 전환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헤겔에게서 절대자는 곧 신적인 것이다. 사유의 힘으로써, 개념의 냉정한 정확성으로써 신의 본질 속으로 파고드는 일, 그것을 바로 헤겔의 논리학이 인수한다. 이제는 존재자와 세계를 그 제한된 현상 방식에서가 아니라, 이것들 그 자체가 절대자의 본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사람만이 이 존재자와 세계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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