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척 쓰기>의 원칙
이 글 들은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일종의 발제서이다.
대부분 읽은 책에 대한 요약이지만 간혹 내 생각을 덧붙여 글을 쓸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하여, 책을 빠르게 읽는 효과를 보기 위한 목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개인적인 목적인데 동기부여를 위해 게시한다고 보면 된다.
나도 정확히 모르므로 덧글을 달면 좋다. 다만 답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1 하이데거의 현상학
하이데거에게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존재(sein)’이다. 이러한 그의 존재론을 뒷받침 해주는 것은 아마 현상학에 대한 그의 견지일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가 가진 현상학의 개념에 대해 지루하게 늘어놓고자 한다.
현상학은 알다시피 그의 스승 후설에 의해 제창되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도서<논리학연구>를 빌려 보다 현상학에 접했다고 하는데, 당시 후설의 책이 매우 인기가 없어 대출연장이 매우 용이했다고 전해진다. 하이데거는 초창기 현상학에 대한 감을 못 잡았는데, 그가 현상학에 대해 가닥을 잡은 건 1913년에 나온 후설의 <이덴>에 의해서였다. 그의 깨달음을 전하자면 ‘순수 현상학’ = ‘철학의 근본학’ 이며, ‘순수하다’는 의미는 ‘초월론적’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초월론적’이란 ‘인식하고 행동하고 가치 정립하는 주체의 주관성을 꾀하는 것’이다. 뭔 소린지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인식되고 체험되는 무언가를 탐구하고 정리한다는 개념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덴>이 아닌 <논리학 연구>에서의 현상학 개념에 대해 좀 더 집착하게 되고, 후설은 이미 <이덴>쪽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하이데거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견지는 이때부터 조금 틀어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인 시선은 현존재의 비 은폐성, 그 드러냄, 그 자기-현시로서 사유되고 있다는 것이 였는데, 사실 이때도 그는 이러한 개념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그가 봉착한 물음은, “현상학의 원리에 따라 ‘사태 그 자체’ 로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그리고 어떻게 규정되는가? /그것은 의식 그리고 의식의 대상성인가. 혹은 비 은폐성 및 은폐에서의 존재자의 존재인가?”하는 것이였다. 이에 따라 그는 존재물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위에서 말한 후설의 초월론적-인식론적 현상학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후설이 이 때 하이데거를 꼬시려고 브리태니커에 실릴 현상학을 공동 집필했는데 하이데거가 자꾸 자기한테 안 맞춰줘서 그런지, 후설은 하이데거의 집필부분을 상당 날림처리하고 브리태니커에 송부한다.
그 삭제된 내용(존재와 시간 서문과 유사하다.)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그리스 철학이 존재자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저런 존재자를 규정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즉 그 존재에 관해서 이해하고자 해서였다.” 그의 존재론적 시각과 사유 이전에 ‘존재’가 존재한다는 아프리오리적 시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중 얘기지만 그는 존재자와 존재를 확실히 구분하고, 존재자로부터 존재로의(존재자 ->존재) 시선전환을 특히 강조한다.
분명, 존재자는 이미 눈 앞에 현존하고 나와있다. 그러나 존재자의 진정한 존재(Q. 이를 현상이라고 바꿔 말해도 문제 없을까?)가 파악해야 할 문제이고, 따라서 탐구의 시선을 존재자에서부터 존재로 환원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를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한다.
* 기본적 의미
사실, 위의 내용들은 대강 넘겨도 된다. 사실 중요한 건 이하부터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현상학은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그것이 자신을 자기 쪽에서부터 나타내는 그대로, 자신에서부터 보게 하는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밑에 내용을 읽어보면 뭔가 가닥이 잡힐 것도 같을 것도 같을까?
우선 현상학은 ‘현상’과 ‘학‘ 이라는 두 구성요소의 결합이다.
현상 : 자기를 나타내는 것, 자기 현시하는 것, 드러나 있는 것.
현상이란 마치 태양의 빛과 같이 그 자체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와도 직결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드러나’ 있다는 표현이다. 갑자기 나타나는 식의 개념은 아니나 은닉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학(로고스) : ‘말함’ 이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전달하는 대상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현상’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이 때 전달내용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대상이 ‘현상’을 보게 하는 것이다. 전달하는 내용은 ‘현상’으로부터 끌어와야 한다. 왜냐면 존재는 주어져 있는 것 안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은 해석하는 성격을 갖는다. duirl서 해석은 통속적인 존재이해를 파괴하면서 폭력적으로 수행 될 수 밖에 없다.
즉, 학(로고스)이란 전달하는 대상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솔직하게 보게끔 하는 것이며 나아가 존재자를 인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속성을 가진 현상학은, ‘존재’와 ‘말함’, ‘존재라는 현상을 말하는 것.’ ‘그것을 밝히고 타인에게 인지시키는 것’으로 정리 할 수 있다.
* 포괄적 의미
1) 현상학은 우연한 발견이 아닌 현상의 자기현시에 따른 그 어떤 문제성 내지 사태적 필연성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고 오직 그것에만 관련하는 것이다.
2) 현상학은 다음 두 가지 인력에 그 발생의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로, 현상은 특정한 물음을 발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적인 필연성을 가진 것이기에 자신을 묻도록 요구한다. 어떤 싸움의 그 자체에서의 문제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사유를 곤란케 해서 그 사태가 사유를 사유의 사태로까지 가져와 이 사태로부터 사유 그 자체에 나아가도록 하는 그런 것이기에 자신을 묻도록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대개 자신을 진정으로 드러내지 않는 바의 것, 즉 자신을 나타냄에 대해 은닉되어 있다는 것, 변장해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 이기에 자신을 묻도록 한다는 것이다.
3) 현상학은 주제를 오직 규정할 뿐이며 제시나 설명할 뿐이다. 결코 그 스스로 임의적으로 그려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학의 주제인 존재가 존재자처럼 우리 앞에 주어져 있고 우리가 그것을 발견만 하면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존재즌 존재자처럼 접근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눈앞에서 단순하게 발견할 수는 없다”고 하이데거는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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