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독일관념론 416~433
2. 헤겔과 우리
초역사적인 것으로서의 헤겔의 사상
우리는 헤겔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을 구별해야 한다. 각 시대는 그 시대마다의 관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이라는 것은 시대 상황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제약되어 있다. 헤겔이 가진 관점도 마찬가지로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는 여러가지 제약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들은 그것들이 헤겔 사상을 (일부분이라도) 소생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데에서, 또한 이것들 없이는 어떠한 것도 일깨워질 수 없다는 한에서, 그들의 고유한 권리를 가진다.
오늘날 체계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다시 소생하는 것은, 우리의 손바닥에 있는 명백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종래의 실증주의적 과학자들이 다루던 것), 배경에 놓여 있는 것, 즉 비사변적 사유가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 즉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의미다. 헤겔에게서 이 '형이상학적인 것'은 역사 속에서나 법 속에서, 종교 속에서나 자연 속에서, 영적 생활 속에서나 논리 속에서도 본래적인 것, 즉 "실체", "참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것의 의미에 대한 요구는 현대에 들어 다시 물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결국 헤겔이 제기한 문제로 우리들이 다시 회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헤겔철학 중에는 우리들이 우리의 관점으로 전혀 체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관념론, 범논리주의, 변증법 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현대에 소생한 형이상학 분야는 이러한 경향과는 많이 떨어져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첫 째, 우리는 헤겔이 제기한 이러한 요소들이 초역사적인 것에 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 결코 미리 알 수가 없다. 둘 째로, 우리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개념들에 편견들과 변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해와 편견에 의해 둘러싸인 것의 대표적인 예로 '범논리주의'가 있다. (이 범논리주의라는 것은 헤겔에게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부터 그에게 적합하지도 않은 개념이다) 사람들은 대개 이 범논리주의를, 마치 헤겔이 모든 문제, 심지어 내용적으로도 가장 이질적인 문제들마저도 "논리적인"형식이라는 메마른 도식으로써 강제로 다스리고자 한 것과 같은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헤겔의 논리학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는 상당히 많은 '비논리적'인 부분을 마주하게 된다. 헤겔의 논리학에서 말하는 '논리'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형식논리학에서 보는 그러한 논리와는 다른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로고스의 의미는 '형이상학'같은 것과 더 유사하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여러가지 범주를 소개한다. 이 범주들은 대단히 포괄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에, 실제로 구체적이고 또 인생과 밀접한 문제들을 정당하게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헤겔이 자신의 체계를 완성함에 있어 결코 이 범주들로 만족한 것은 아니다.
헤겔에 의하면 일체의 새로운 문제 영역에는 그것에 걸맞는 새로운 범주가 존재한다. 또한 헤겔의 논리학에서 획득된 기본 규정들은 여기저기서 반복되게 되는데, 이러한 반복이 여러가지 제반 내용들에 대한 '속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오히려 이 규정들은 내용들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하게 변화하여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토대의 통일성(왜 통일성이지? 유동적 통일성이라서?)에 홀려서 제 정신을 못 차리게 될 지경이다.
또한 우리들은 범논리주의를 보편적 합리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세계에다 '인간적 이성'이라는 개념 도식을 부여하고, 이를 토대로 헤겔이 말한 명제, 즉 "이성적인 것만이 현실적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헤겔은 인간적인 유한한 이성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또한 "현실적"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유한한 이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유한한 이성'이 아닌 '확장된 사변적인 이성' 개념이 그 기저에 놓이게 된다면, 헤겔이 말한 "현실적"이라는 말은 특별히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게 된다. (논란이 없어진다는 이 부분은 아직 정확하게 공감하지는 못하겠다) 또한 그것은 본래적인 합리론과도 다른 것이라고 봐야한다.
그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고, 또 합리론과도 거리가 먼 이유는 이렇다. 그것은 신적 또는 "절대적" 이성의 합리론은 우리로부터 비합리적인 그 어떤 것도 결코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헤겔의 입장은 그것을 은폐하거나 논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식되지 않은 것 그 자체를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추구하는 방법, 또 이렇게 추구하는 가운데서 직접 문제를 전개하는 모범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떠한 모순도 회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모순 자체를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어떠한 형식에서건, 무조건 타당하게 하는 그러한 방법이다.
헤겔의 사유를 이끌어가는 방법론, 변증법
변증법은 바로 이 일을, 즉 모순을 발견하고 또 이 모순을 그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시인하는 이 일을 일반적인 형식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변증법이 모순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것이 모순성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이성의 개념들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증법은 사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고정된 개념들을 파괴한다. 개념이 "유동적인" 구성물, 즉 사변적 개념으로 되면, 이렇게 됨으로써 개념은 그 자신이 비합리성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헤겔이 이해하는 '개념의 생명'이라는 것은, 유한한 이성의 의미에서 합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정당하게 헤겔의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의미 깊은 '비합리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헤겔의 사상이 합리주의라기보다는 비합리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비단 헤겔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피히테, 셸링, 플라톤, 플로티노스 등 또한 역시 변증가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변증법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변증법의 제 형식이 아무리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어떤 기본적인 성격 – 예컨대 그것이 갖고 있는 엄청나게 높은 사변성이라든지, 개념의 운동성, 계기들의 반정립, 범주적 법칙들의 도출 – 같은 것들은 언제나 반복해서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문제 영역들은 변증법을 요구하고, 또 변증법이 아니고서는 그 문제들이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변증법 자체의 초역사적인 의미를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변증법이 현실적으로 필수적이며,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철학의 요소라고 하더라도, 즉 변증법이 다른 형식의 사상들은 도달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하여 사실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특수한 접근법임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변증법이 결코 철학의 보편적 형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다만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백히 어떤 배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고, 그 중에서도 몇몇의 사람은 변증법의 고유한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는 사정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사유라는 천부의 재능은 단연 예술가의 재능, 즉 천재에 비유될 수 있다. 변증법적 사유는, 그 법칙에 대한 설명이나 지식이 없이도, 매우 법칙적이며,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제어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이 재능에 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많은 부분에 있어 헤겔에게로 회귀하는 가운데, 유독 변증법으로는 기울고 있지 않은지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비단 우리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증법은 결코 공유 재산이 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변증법은 천재들의 특권이다. 천재가 아닌 우리들 타인들도 물론 변증법으로부터 배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변증법을 체득할 수는 없다.
이 술만 있으면, 나는 절대정신에 도달할 수 있을까?
헤겔 관념론의 특징
다른 한편 헤겔의 "관념론"은 그 사정이 전혀 다르다. 관념론은 우리가 그것으로 돌아가야 할 명백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사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겔의 관념론을 '범논리주의'처럼 쉽게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이 관념론이 헤겔 특유의 사상이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피히테, 셸링은 자기들 고유의 방식대로 거의 헤겔과 동일한 지점에 도달했다. 이성의 관념론은 말하자면 이 시대의 공유 재산이다. 헤겔은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이것을 더 자세히 진술하고, 더 보편적으로 전개했을 뿐이다.
헤겔의 관념론은 매우 한정된 관념론, 즉 "절대적 이성"의 관념론이다. 이 관념론은 잘 알려져 있는 관념론의 주관적 형식들과 – 그리고 또한 칸트의 선험적 형식들과도 – 별로 관계하지 않는다. "절대자"는 "이성" 그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은 자기의 유한한 이성 속에 절대자에 이르는 직접적 통로를 가진다. 철학이라는 것은 유한한 이성이 절대적 이성을 통해서, 그리고 절대적 이성에로 자신을 고양시킴으로써 유한한 이성을 돌파하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것과 같은 신념들은 헤겔 체계의 토대와 원리를 이룬다.
체계 자체는 이 신념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체계" 자체가 곧 헤겔의 철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헤겔의 철학 속에는 체계의 형식에 의해서 제약받지 않은, 즉 형식으로부터 자율적인 많은 사상재가 존재한다. 헤겔은 –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 대상에 관점을 새겨 넣는 일이 없이, 즉 대상을 어떤 한정된 이론의 빛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 없이, 대상 그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대상을 그 내부로부터 밝히는, 놀랄 만한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정신의 현상 형식들을 기술하고, 상호 간의 한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해냈다. 그것도 이론과 관점을 탐색하는 해석자들이 발견하려고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으로 해냈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이쪽에 머물러 서서 부동하고 있는 객관성이야말로 헤겔 변증법을 특징짓는다. 변증법이란 것은 헤겔 체계의 내용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틀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우리는 자주 마주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변증법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즉 체계와 관점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이요, 대상에의 완전한 내맡김이며, 가장 정교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대상에로 움직여 가는 대상에의 섬세한 밀착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모든 도식은 변증법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변증법은 문제로부터 문제에 이르고, 내용으로부터 내용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다른 변증법이 된다. 그리고 변증법은 점점 관점을 변경하고, 결코 관점에 매달리지 않는다.
물론 관점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헤겔 연구의 모든 부분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관념론을 과시해보이는 문구도 있고, 관념론을 원리적으로 전개하는 문구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변증법의 본질 속에서가 아니라, 헤겔 세계관의 체계 속에 놓여 있는 문제다.
칸트 및 많은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있어서도 직관된 것의 의미는 체계의 틀에 박혀버린 편협한 어떤 것이 아니다. 직관된 것은 체계에서 독립해 있는 것, 관점을 초월해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즉 그것은 체계를 파괴하고 만다. 그런데 이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체계라는 것은 원래 사상적인 착상, 가상, 시도일 뿐이다. 이에 반하여 개별 문제 속에서 직관된 것은 대상에서 획득한 것이고, 대상 속으로 침잠한 데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은 채 문제들을 추적해 가는 그의 방식은 독특한 힘과 냉정함을 갖고 있다. (그는 자기의 체계에 대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헤겔의 논리학 = 존재론
존재, 질, 무한성에 관한 헤겔의 이론이 그의 이성 관념론에 종속해 있다면, 이 이론은 관념론과 더불어 몰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것으로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이론은, 그것이 논리학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처럼, 이 관념론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이론은 관점을 초월해 있는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른 형식으로 다시 개조될 필요는 전혀 없다. 이 이론은 이미 헤겔에게서는 관점을 초월해서 포착된 것이다.
헤겔의 "논리학"은 이러한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헤겔의 논리학을 읽는 와중에 관념론적 체계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존재론적 문제에 고심하는 사람은, 헤겔의 논리학에서 뜻밖의 풍부한 원천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헤겔의 존재론은 독일관념론의 전체 발전에 매우 독특한 빛을 던져준다. 헤겔에 의해 독일 관념론은 점점 더 객관적으로 된다. 독일관념론은 초기의 피히테와 셸링에 있어서는 아직도 매우 주관주의적으로 채색되어 있었고, 그리고 실로 경험적 자아로부터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경험적 자아를 유추해서 이해하게 되는 어떤 자아 개념에 결부되어 있다. 물론 후기의 지식학 및 동일성의 체계 속에서는 이러한 관념론은 이미 극복되어 있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서 이 관념론은 그 역할을 완전히 끝내 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관념론이 자기의 자리를 새로운 실재론에 양도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헤겔의 연구는 관점상의 대립의 지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 지평을 넘어섬으로써 비로서 대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성격을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관념론 자체의 존재론에로의 철저한 전환이다. 그것은 관념론의 역사적인 자기 극복이다. 이 극복은 관념론 고유의 문제들 속에서 다름 아닌 관념론 고유의 내적 일관성에 이끌려 발생한다. 즉 그것은 관념론의 본질에 따른 변증법이고,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넘어서는 관념론의 자기 고양이며, 보다 넓은 본질 속으로 이행하는 관념론의 자기 지양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관념론이 이러한 자기 지양에 이르기까지 뚫고 나아가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독일관념론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최대한의 역사적 증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