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독일관념론 403~415
1. 헤겔의 사상을 읽고 이해하는 법
개념 파악적 사유란?
헤겔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나 같은 풋내기들이 항상 마주하게 되는 난점, 그건 헤겔의 철학이 지독히도 '추상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헤겔이 사용하는 '개념'들은 이처럼 지독한 추상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헤겔이 생각하는 이 '개념'이라는 것은 참 특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 운동성이라는 것은 생동적이며, 판에 박힌 듯한 형상을 파괴하며, 따라서 개념 자체를 판에 박힌 개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또한 개념을 지속적으로 변경하고 전개시키는 '유동성'을 갖고 있다. 즉 헤겔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유동화' 및 '생동화'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유과정 안에서 이러한 유동화를 수행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개념들을 생동적인 것으로 만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헤겔은 '비사변적 사유'와 '사변적 사유'를 대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비사변적 사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째로, 그것은 추상적이다. 주의할 점은, 추상적인 것은 생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둘 째로, 비사변적 사유에 사용되는 '개념'들은 편협하고, 경직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개념은 유동화 되려고 하지 않으며, 사태의 내면적 생명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비사변적 사유에는 헤겔이 "개념의 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돼 있다. "개념의 노력"이란 개념 자체가 경직된 도식을 파괴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구체적 형태"에로 돌파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위에서 말한 '운동성'을 이행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개념의 노력"과 반대되는 것을 두 가지 들 수 있다. 하나는 표상적인 생활 습관, 또 하나는 형식적 사유이다. 둘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표상적 생활습관은 소재 속에 빠져서 그 속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형식적 사유는 판에 박힌 듯 한 개념을 가지고서는 자기가 소재를 초월해 있다고 생각하고, 어리석게도 이렇게 자기가 '오해한 자유' 속에 안주하곤 한다. "개념의 노력"은 곧 "철학적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철학적 사유란, 위에서 말한 '오해된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며, 이러한 자유를 '내용' 속으로 침잠시켜서 이 내용이 그 고유의 본성을 통해서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그 운동을 고찰하는 것이다. "개념의 노력"은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해방이라는 것은 '추상이라는 경직된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개념의 노력이라는 것은 일회적인 타개로서가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지속적으로 수행된다. 즉 해방이란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개념 일반을 그 추상적인 경화 상태로부터 차츰차츰 벗어나게 하여, 이 개념을 그 고유의 본성을 통해, 즉 그 동적 역학을 통해 인식하고 또 사용할 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은 "논쟁적(=형식적) 사유"와 "개념 파악적 사유"를 구별시키기도 한다. 논쟁적 사유의 특징은 이렇다. 여기서 판단의 주어는 고정된 '토대'의 역할을 하며, 여기서 '내용'은 이 토대에 술어의 형식으로 결합한다. 따라서 이 때 이 술어 속에서 주어 그 자체는 결코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또한 이 경우 술어는 외면적이다. (질문 : 이것은 '분석판단'에서 말하는 것, 즉 주어 안에 이미 술어가 모두 포함되어있다는 내용과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이와 같은 사유는 술어 속에서 주어를 파악하지 못하고, 주어를 놓쳐버리고 만다. 이 사유가 주어를 이미 파악하였다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이 주어를 잘못 붙잡은 것이다. 따라서 "논쟁적 사유"는 언제나 사태의 본질을 놓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주어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술어의 다양성을 '대상 자체'(=주어)가 전개되어 가는 본질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개념 파악적 사유"에서 '대상의 고유한 자기'(=주어?)는 개념의 생성으로서 나타난다. 이 '자기'는 부동의 상태에서, 즉 자신이 토대가 된 상태에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정지하고 있는 주어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며 자기의 규정을 자신 속에 회수하는 개념이다. 이 과정에서 사태의 본질이 나타나게 된다. '개념'이 파악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형식의 구조물이 아니라, 차이성과 대립을 두루 관통하는 '형식의 다양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식의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여기서의 통일은 경직된 통일과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경직된 통일은 경직된 형식을 가져올 뿐이다. 경직된 통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그대로의 대상 속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은 어떤 전제되고 미리 받아들여진 주어 개념 속에서가 아니라, 주어 개념에 대한 술어들 그 자체의 다양성과 대립성 속에 놓여있다.
이런 경험은 우리가 학습을 해 나감에 있어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대상에 대해 사유한다고 생각해보자. 특정한 사유가 대상을 개념적으로 고정시키자마자, 이 대상은 사유로부터 미끄러져 달아나 버린다. 하지만 사유가 대상의 운동에 적응하게 되자마자, 대상은 사유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저절로 생겨난다. 어떤 사유든지 "논쟁적 사유"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대상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바깥에 두는 사유이다. (자기=사유를 의미하는건가?)
비사변적 명제와 사변적 명제에서의 주어와 술어 간의 관계
비사변적 명제에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어에 그 술어가 단순히 부가되어 있는 명제 속에서는 이 주어와 술어 양자의 관계는 외면적 관계로 머물러 있다. 여기서 주어는 보다 더 내용이 풍부한 것이므로 술어에 동화되지 않는다. (술어는 그저 주어라는 커다란 덩어리에 덧붙여지는 잔가지(속성)들이기 때문?) 다른 한편 술어는 보다 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주어에 동화되지 않는다. (A라는 술어는 하나의 주어 뿐 아니라 이 주어 저 주어에도 붙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
사변적 명제에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이야기한 주어와 술어 사이의 '외면성'은 사라진다. 주어는 그 술어 속에서 전개되고, 주어의 내용은 이 술어 속에 실현된다. 주어는 '자기의' 술어 이외에 다른 '술어나 속성'을 가질 수 없다. 즉, 술어는 "주어로부터 자유로이 독립하여 몇 개의 주어에 결합하게 될 보편자가 아니다."
일상적 대화에서는 술어가 보다 더 보편적 의미를 갖고 있는 낱말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낱말의 의미가 확고하게 정해져 있고, 그것이 명제의 구조에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사변적 명제에서는 다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의미를 임의로 대치할 수 없다. (즉 다른 영역의 술어를 이 영역에 사용할 수 없다는 뜻?) 사변적 명제에서의 '의미'라는 것은 내용 관계 그 자체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이 내용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대로의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맥락을 통해 알 수 있다는 뜻인가?) 사변적 명제에서는 명제가 표현해야 하는 내용적 구조가 미리 확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내용적 구조가 낱말에 일회적인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전체의 연관이 개념의 내용을 보증한다. 따라서 헤겔은 사변적 명제의 이러한 성격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은 사실상 더 이상 주어의 술어가 아니고, 실체이며, 논의되고 있는 그것의 본질이요, 개념이다"
개념은 자기의 내용을 '주어 속에도, 술어 속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양자 속에서 단지 현상할 뿐인 그 어떤 것'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이 '그 어떤 것'이란, 판단('S는 P이다'와 같은 것)의 '실체'이고, 속박될 수 없는 유동적인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개념이라는 것은 판단 속에서 비로소 성립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