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위클리 논문 리뷰

위클리 논문 : <A wolf sublime : Psychoanalysis and the animal>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11. 9. 15:41

 

저자는 Chris Powici라고, 영문학 연구자란다. 아무튼 이번 논문의 제목은 <A wolf sublime : Psychoanalysis and the animal>이다. wolf sublime이라니 무슨 말인가? 저자는 정확히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sublime을 wolf라는 대상에 적용시키고 있다. 칸트적인 이성은 거대한 자연물을 바라보면서 어떤 균열을 경험함과 동시에 이성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지 않나. 저자는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늑대인간 사례에서, 꿈 속에 나타난 '늑대'들이 그러한 '자연물'과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꿈 속의 늑대 = 꿈틀대는 무의식 = 인간 안의 동물성 = 이성의 힘으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것'이고, '해석된 꿈 속의 늑대 = 의식화된 무의식 = 동물성을 정복한 인간 = 이성의 완전한 해석'라는 식의 논리다.

 

저자가 보기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에서 '동물'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늑대'같은 동물은 언제나 오이디푸스라는 구조적 틀로 해석된다. 해석되기 이전의 그것은 '야생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무의식으로 간주되고, 해석이 된 후에 그것은 자아에 의해 파악 가능해진 어떤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파악 가능하다는 것은 '늑대가 사실은 아버지의 치환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이런 구조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꼬마 한스의 사례에서도 '말'은 언제나 '아버지'의 치환물로 존재하고, 따라서 '말'에 대해 갖는 한스의 양가감정은 곧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치환된 형태임이 밝혀지게 된다.

말하자면 모든 동물은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을 상징화하는 어떤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걸까? 여기서 저자는 이 논의를 한 발자국 더 이끌고 나가서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를 다룬다.

 

<토템과 터부>에 따르면 원시부족의 토템은 결국 원초적 아버지 (모든 여성들을 혼자 독차지 했던, 그래서 결국 아들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그로써 아들들에게 영원한 죄의식을 심어주었던 아버지) 의 치환물이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아들들은 죄의식에 시달린 나머지 서로 간에 협의를 마련한다.

 

'우리 더 이상 토템 동물을 죽이지 말도록 하자. 너희 중 누구도 토템 동물을 건드리는 자는 우리가 가만 두지 않겠다.' 그러나 특이한 건 이들 아들들이, 그래서 우리 인간의 선조들이 토템에 대해 이상한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토템의 살해를 금지하는 동시에, 때때로 기념삼아 토템을 함께 죽이고 그것을 먹으며 축제를 벌인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묘한 양가적 태도를 모든 양가감정의 기원으로 본다. 그러한 기원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아버지에 대해서도 한편으로 그를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가진다. 이것은 아버지를 넘어 선생님에게, 왕에게, 대통령에게 치환되면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식의 해석이 '동물'에 대해 너무 일면적인 면만 다루고 있다고 본다. 저자는 양가감정의 테마를 인간/동물의 이분법구조 속으로 끌어들여와 재해석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모든 서사들 안에는, 단지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의 흔적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인간 안의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성에 대한 양가감정 또한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동물성을 극복하고 문명화된 인간이 되고자 하지만, 그것은 우리 안의 무언가를 잃게 만들고 결국 우리의 일부분을 부정해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이는 '무의식'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의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것은 '나 안의 타자'라고 볼 수 있다. 내 안에 타자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무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타자'를 누군가는 억압된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대타자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동물'이라는 요소로 설명하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무의식은 우리 안의 날 것의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성이다.

 

저자가 마지막에 인용하는 <늑대 인간>의 한 구절이 주는 울림이 크다. 늑대인간은 프로이트에게 처음 치료받고 난 뒤 약 40년 뒤 그를 다시 찾아와 이런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사실 이전에 <늑대 인간>을 볼 때 이 구절을 그다지 중요하게 읽지 않았다) "... 매년 여름 주변 마을의 농부들에 의해 여러차례 늑대사냥이 진행됐었다. 이 사냥의 끝에는 항상 아버지가 비용을 지불해서 치뤄지는 저녁 축제가 이어졌다. 마을 악사들이 등장하면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전통 춤을 추곤 했다 ..."

 

저자는 이 언급을 보면서 묻는다. "이 늑대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정통 프로이디안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늑대 사냥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동물성을 부정하고 문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다. 단순히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총평 : 요즘 이런 논문들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원주민 = 동물'과 '문명시민 = 인간'을 나누는 이분법적 구조가 공통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더군다나 저자는 문명과 인간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국주의적'이라는 단어도 쓰는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요즘 학계의 유행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좀 한계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식의 논의는 그저 무의식이라는 주제를 동물성이라는 말로 바꿔서 리프레이즈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우리가 동물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동물에 대한 주제를 분석 세션에서 '탈 오이디푸스화'해서 더 다뤄봐야 한다는 말인가? 이 모든 점이 애매하게 남는다. 만약 무의식이라는 것이 우리 안의 동물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동물성을 단순히 억압하기보다 '되찾을'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어떠한 전략을 택해야 하는 것일까. 그저 '승화(sublimation)로는 부족해요!'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승화가 아니라면 무엇이 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