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위클리 논문 리뷰

위클리 논문 - ANIMATING RELATIONS: Digitally Mediated Intimacies between the Living and the Dead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11. 9. 15:40

 

- 이번 논문도 인류학 쪽 논문이다. 저자는 본인이 연구 대상으로 추적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Erin에 대해 소개한다. Erin은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었다. 애도 단계에 있는 셈인데, 특이한 점은 그녀가 어머니와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 Erin은 엑셀 파일에 항목을 만들어 당시에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당시의 감정이 어땠는지, 어머니와 관련해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당시 자기 주변에 어떤 사물들이 있었는지 등을 input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이것을 어떤 앱에 올리면 그 앱이 그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전환해준다. (사실 애니메이션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 건지는 나도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모르겠다) 아무튼 Erin은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냄으로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녀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어나가는 것이다.

 

- 한 번은 저자가 그녀에게 어머니와 관련해 본인이 올렸던 데이터를 다시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Erin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는 대답을 들려준다. 한 번 해보는 게 어떻냐는 저자의 권유에 Erin은 이전 데이터들을 복기해본다. 근데 특이한 점은 그녀가 그것을 그다지 유쾌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저자는 Erin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어머니와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탐구한다. 그것이 의미 있는 이유는 죽은 대상인 어머니를 눈에 보여질 수 있는 대상으로 다시 복귀시키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머니와의 과거 기억을 보존시켜주기 때문일까?

 

- 저자는 Erin과 유사한 다른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사망한 딸을 가상현실로 불러왔던 그 실험을 떠올려봐도 될 것 같다) 사별한 사람들이 애니메이션화된 자신의 사망한 가족을 조우할 때, 세세한 시각적 디테일에 신경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 그렇다고 그들이 단순히 사망한 가족과의 기억을 '보존'하는데 의의를 두는 것 같지도 않은 것 같다. 애니메이션과 같은 테크놀러지는, 그것이 사망한 사람의 내러티브를 '기록'하거나 '보존'하는 데 쓰이는 수단이 아니라, 그러한 내러티브를 계속해서 '구성'해나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한 사람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할 때 실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 그 사람이 어떠어떠한 일을 했었는지와 같은 객관적인 현실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 이 구성이라는 면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페이스북 계정의 사례를 들기도 한다. 사망한 가족의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지 않고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자. 저자는 그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유지하는 이유가, 그 사망한 사람이 과거에 올렸던 포스팅을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페이스북의 의의는 오히려 해당 가족이 사망한 이후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그곳에 찾아와 그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의 사망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것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 애니메이션이 '구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측면은 '코스프레'라는 일본 문화의 (그러나 요즘은 전세계 어디로나 퍼져버린) 맥락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저자는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 꼭 해당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의 '내러티브'를 완전히 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더군다나 코스프레는 단순히 정해져 있는 내러티브 속의 어떤 캐릭터를, 이용자가 수동적으로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코스프레와 관련한 다른 연구 결과들을 끌어오면서, 코스프레라는 현상이 다분히 쌍방향적이라는 것, 다시말해 코스프레를 행하는 주체가 캐릭터를 재구성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캐릭터가 코스프레 주체를 재구성하기도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코스프레 안에서는 쌍방향이 동일하게 어떠한 새로운 캐릭터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 Erin의 사례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녀는 어머니와의 상실된 관계를 다시 그대로 복귀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구성적인 것으로서 이어나가기 위해, 그리고 그런 한에서 어머니-딸이라는 구성체를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머니를 애니메이션화하는 'Practice'를 행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Practice'를 푸코가 말한 'Askesis'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 이 논문에서 눈여겨볼 만한 강조점들이 있다면,

1. 저자가 기억을 '보존되었다가 불러와지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계속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기억 안에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직선의 관계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송두리째 계속해서 시점간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

2. '관계'를 중요시함으로써, 대상 중심적이기보다는 관계 중심적인 면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가 직접 그런 철학적 맥락을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관계를 생각할 때, 대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관계 속에서 대상이 구성되는 것으로 보든지 선택할 수 있는데, 저자는 후자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그러한 '관계'에 꼭 인간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Erin의 사례에서도 그녀가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구성해나갈 때는 반드시 Erin이 데이터를 등록하던 당시 주변에 있던 사물들, 그것에 관한 그녀의 감정 같은 것들이 함께 등록될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나 앱이라는 테크놀러지가 함께 맞물려 새로운 구성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애니메이션이 없다면 그녀는 구성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

 

- 덧붙여 추가적으로 들었던 쓸데 없는 생각은,

 

1. 기억의 재구성과 관련된 현대 정신의학의 연구 결과들을 접목하면, 뭔가 더 실용적이고 바람직한 askesis의 방안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과 연구 중에서 'ECT(전기경련치료)'의 부작용 중 왜 기억상실 같은 것이 있는지를 다룬 것이 있다. ECT를 시행받은 사람은 '새로운 기억'을 '공고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기억을 등록을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공고화해서 어떤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것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ECT를 받는 사람들은 원래 새로운 기억은 제대로 형성하지 못해도, 과거의 기억은 온전하게 보존하는 편이다. 근데 한 연구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다. ECT 시행 전에 '과거의 특정 기억'을 떠오르게 한 뒤, ECT를 시행했던 것이다. 근데 이런 사람들은 안 그랬던 사람들과 달리, 그 떠올렸던 과거의 기억마저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연구자들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과정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어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면, 그것이 의식화되면서 '흐물흐물한' 상태가 되고, 다시 재저장됨으로써 기존의 기억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사실 심리치료의 효과도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환자로 하여금 과거의 외상적 기억을 회상하게 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게 함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을 받아들일만한 기억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불러오는' 과정까지 하고 나서 ECT를 수행하면, 그것이 공고화되는 것이 방해되면서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지 않고, 결국 있었던 장기기억마저 사라지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나는 ECT까지는 아니어도 tDCS(머리에 직류 전류를 흘려주는 휴대용 치료기기)를 하면서 조금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보던 한 환자는, tDCS만 하면 자꾸만 쓸데없는 기억이 떠오른다는 부작용을 호소한 적이 있다. 당시 교수님은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셨는데, ECT의 효과를 떠올려보면 꼭 의미가 없는 부작용만은 아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가 상담치료를 하는 과정 중에 tDCS같은 것의 도움을 받으면, 기억을 재구성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아마 이런 쪽 연구가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 <오징어 게임>같은 작품이 흥행한 이유를 조금 다르게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대부분 분석들은 작품의 흥행 원인을 '내러티브'로 돌린다. 내러티브가 단순하다든지, 설득력이 있어서 보편성을 띠고 그래서 전세계적 흥행을 불러왔다는 식이다. 그런데 만약 <오징어 게임>의 매력이 그것의 내러티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askesis화 가능성, 다시 말해 그것을 보고 난 사람들이 그것을 반복해서 따라하면서 자기들만의 맥락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에 있다면 어떤 분석이 나올 수 있을까. 어찌보면 <오징어 게임>만큼 '코스프레'하기 좋은 영화가 또 있을까? 거기에는 따라 입을만한 특이한 '옷'들이 있고, '게임'들이 있다. 더군다나 그 '게임'이라고 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변주 가능한 것들이다. (실제로 이런 '게임'들이 국내 안에서만 얼마나 많은 '버전'들을 갖고 있는지 떠올려보라. 그런데 그것이 세계로 나간다면 그 변주 가능성이 얼마나 넓어질지 상상이나 되는가. )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오징어 게임>은 어른들이 갖고 놀 수 있는 '포르트-다' 놀이다. 우리는 실뭉치를 던졌다 끌어왔다를 반복하면서 부모의 부재라는 외상을 극복하려 했던 그 아이처럼, 어쩌면 수많은 '게임'들을 자기들만의 맥락 안에서 반복함으로써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려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재미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코스프레라는 건 그냥 재밌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