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논문 리뷰 : <Kittens in the Clinical Space: ExpandingSubjectivity through Dense Temporalities of Interspecies Transcorporeal Becoming>, Katie Gentile
앞으로 일주일에 1-2편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논문을 리뷰해서 올려보려고 한다. 이렇게 게시라도 해야 스스로 채찍질이 될 것 같음...
위클리 논문 리뷰 : <Kittens in the Clinical Space: Expanding
Subjectivity through Dense Temporalities of Interspecies Transcorporeal Becoming>, Katie Gentile
- 요즘 신유물론이다 포스트 휴머니즘이다 뭐다 이런 의견이 많은데 정신분석학에 그런 것을 적용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런 것과 관련된 논문을 앞으로 리뷰해보고자 한다. 이 논문도 그런 맥락 속에 있는 논문.
- 저자인 Katie Gentile라는 사람이 여성 분석학자인데 자기가 보는 Latrice라는 라티노 여성 환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고 살았던 여성으로, 감정조절이 어려운 사람이다. 얼마 전부터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고 이걸 저자에게 이야기했는데, 저자는 (마치 Latrice가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물론 정신치료라는 목적 상, 그걸 겉으로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법. 그렇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았어도 그 분위기가 전달되지 않겠나. Latrice가 먼저 침묵을 깬다. "내가 고양이에게 어떻게 할 것 같아요?(What do you think I’m going to do to this kitten?)"라면서 말이다.
- 여기서 저자는 현재 고양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이 매개된 이 장소에서, 이 진료현장이라는 장소에서 현재 어떤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지 분석한다. 일단 그녀의 염려는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을까? 그녀가 보기에 거기에는 문화적이고 인종학적인 뉘앙스 (구출자 백인)와 함께, 고양이에 대한 오이디푸스적인 해석 (그녀는 자신이 학대당한 것과 동일하게 고양이를 학대할 것이다)이 스며들어 있다.
- 문화적이고 인종학적이면서 오이디푸스적인 해석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이 두가지 관점 모두에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위계적 심연이 자리한다고 본다.
- 먼저 오이디푸스적 해석에 대해 다뤄보자. 그녀는 정신분석학이 동물을 다루어온 전통을 간략하게 훑는다. 그녀가 보기에 전통 정신분석학이 비인간 대상을 다루는 방식은 narcissistic하거나 (다시 말해 대상이 자신의 self의 연장으로 간주되면서 착취적인 관계의 전조가 마련되거나) transitional object (여기서 transitional하다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그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어린 아이가 추후 인간과 제대로 된 대상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즉 연습대상으로서의 이행기적인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로 간주되거나 Oedipal prosthesis (가령 상실된 부모에 대한 애착을 대체할 만한 대상) 와 동일시된다.
- 이런 관점 속에서 비인간적 대상은 그것 자체로 간주되기보다 언제나 인간의 세계라는 틀을 투과하고 난 결과물처럼 간주된다. 저자는 여러 이론을 소개하면서 이처럼 비인간적 대상이 인간적 대상과 근본적으로 구별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 저자는 Harold Searles의 Primitive castration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Latour의 The great divide라는 개념에 상응하는 것으로 본다. Primitive castration란 원초적인 ego가 세계와 분리되는 계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castration 개념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초자아를 내면화하거나 (프로이트) 상징 세계 속에 욕망하는 존재로 들어서기 위해 (라캉) 필수적인 계기로 간주되는데, primitive castration은 그것과 조금 다른 맥락에 속한다. Searles는 이러한 거세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원초적 계기를 마련한다고 본다. 그것을 통과해야만 인간이 동물, 식물, 사물과 같은 제반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을 (혹은 다르게 말해 문명이라는 것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저자는 이러한 맥락을 정치적인 맥락과 연계짓고자 한다. 그녀는 Butler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primitive castration이 젠더의 발생과, 또 Haraway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근본적 분리가 정치적인 맥락을 함축한다고 본다.
- 저자가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화적이고 인종학적인 개념을 포괄한다. 그녀는 토착민 연구를 끌어들이면서, 그들이 세계와 맺었던 관계가 지배자들 혹은 식민주의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는지 집중한다. 그녀는 Searles의 의견이 서양식 사고구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다시말해 지배적인 서양중심적 사고에서는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인간 주체성의 성공적 발현이며, 동시에 자연으로의 회귀 혹은 자연과 다시 융합(merge)되는 것이 primitive하며 퇴행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 그녀가 바라보는 비식민주의자적인 세계관은 다른 대상들을 인간과 구별하지 않고, 그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함께 창발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 여기서 저자는 Dense temporality라는 개념을 소개하는데, 사실 이 개념이 무엇인지 아직 좀 애매하다. 그녀는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소개하면서, 시간이라는 것이 미래를 향히 일직선적으로 흐르기보다는 시간이라는 창발적인 사태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co-emerge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인간이란 다른 모든 사태들과 함께 co-emerge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신유물론의 사조에 의존한다. 다시말해 그녀는 '인간을 구성하는 genome의 90%는 사실 박테리아, 원생생물에 속한다'는 의 그것이다'라는 Haraway의 의견을 공유하면서, 인간이 시간 속에서 독자적인 존재로 드러나기보다는, 다양한 신체들의 세계 속에 있는 단지 한 타입의 신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 다시 Latrice의 사례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이 사례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그녀는 논문 후반부에 다시 Latrice의 사례를 도입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Latrice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순간 저자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금 여기에서, 한 때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 탄생했던 라티노 여성을 앞에 두고서, 자연으로부터 독립되고 배제된 백인이, 고양이라는 순진한 잠재적 희생자를 구출해내려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 안에서 primitive한 원주민과, 그로부터 약자를 지켜낸다는 명목으로 제한을 가하려고 하는 백인 지배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 여기서 저자는 두 가지 트라이앵글이 유령처럼 쫓아다닌다는 것을 증언한다. 피지배자-순진한 자연-지배자라는, 그리고 동시에 학대자(Latrice의 엄마)-학대받은 아이(Latrice)-치료자라는 트라이앵글 말이다. 이런 관점 속에서 Latrice와 고양이 사이의 관계는 과거 양육 관계의 반복이 되거나, 식민지배적 역사의 반복으로 격하될 위험에 처한다.
- 그러나 저자는 부지불식간에 이런 반복의 수렁 속에 빠지는 대신, 현재 진료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다시금 재사유하면서 그것을 re-colonize하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저자는 Latrice와의 대화 속에서 오이디푸스적 갈등의 반복이나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배치의 반복이 아니라, 지구 상의 한 생물체에 대한 다른 생물체(인간)의 교감을 포착하고자 한다. Latrice는 이 '검은색 고양이'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불운과 연계지어 피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그러한 고양이를 돌보고 싶다는 의견을 표한다. 또한 그녀는 자기 스스로 감정조절이 안 되고, 그렇기에 잠재적으로 고양이를 학대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 그러던 중 어느 날 Latrice가 찾아와 해결책을 마련했다며, 집 안에 다른 룸메이트를 들여놓기로 했다고 말한다. 밤 중에 고양이 때문에 잠을 깨서 고양이에게 화를 내는 대신, 야간 일을 하는 룸메이트를 들여 밤에는 그녀가 대신 고양이를 돌봐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녀와 고양이 사이의 관계는, 동일한 과거의 반복이 되기보다는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 저자는 논문 내내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한 듯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몇 가지 한계도 보인다. 가령 정신분석학의 신봉자들은 Latrice가 고양이와 새롭게 관계를 수립하고자 한 사태를 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Latrice가 겪은 과거에 대한 반동형성이 아니냐. 다시 말해 그녀가 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받은 사실에 대한 반동으로서 고양이에 대한 연민이 생긴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이디푸스적인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은 불필요한 것 아니냐고 말이다.
- 개인적으로도 이런 비판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을 지 애매하다. (물론 논문의 목적이 이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저런 이론을 갖고 설명하는 것은 괜찮지만 어딘가 필연성이 결여된다고 해야 하나. 그녀는 고양이라는 비인간적 사물 자체와 인간 사이의 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즉 그것은 기존의 인간-비인간 위계 구조에 반대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만) 규정되는 것 같고, 그러한 관계 자체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 것 같다.
-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narcissistic object나 transitional object의 존재론적인 지위를 다루는 부분에 크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전통적인 object의 개념은 오히려 narcissism과 transitional object라는 계기를 통해 비사물적인 대상을 끌어들일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약간 이단적이고 비전통적인 해석일 수는 있지만, 나는 이런 식의 재해석을 통해 논의를 이끌어나가는 것도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