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잃어버린 주말>, 1945

verleugnung 2020. 8. 27. 21:49

# 들뢰즈가 이 영화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영화의 쇼트와 쇼트가 연결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소비에트 몽타쥬 이론에서는 쇼트와 쇼트가 헤겔 식의 변증법마냥 충돌한다. 두 가지는 부정이라는 개념에 의해 충돌한다. 쇼트A와 쇼트B는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며 충돌한다. 이 과정에서 A와 B가 지양되고 어떤 새로운 '개념'이 생겨난다. 소비에트 몽타쥬는 바로 그런 지양에 의한 개념의 '운동'을 이야기한다.

#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진짜 운동'은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발생'한다. 들뢰즈에게는 언제나 어떤 '전체성'의 개념이 있다. 베르그송으로 말하면 '지속'이다. 우리가, 과거 영화가 처음 발명됐을 시점에 자주 등장하곤 하던, 어떤 '말'의 운동을 관찰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말의 운동을 매 시간마자 촬영한 뒤 이것들을 연결해서 어떤 영상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러한 장면 하나 하나가 말의 운동을 나타낸다고 여긴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운동은 오히려 그러한 죽어있는 장면과 장면의 '사이'에서 포착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나 포착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쇼트와 쇼트는 서로 부정에 의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서로 호응을 하는 가운데, 한 쇼트가 '전체성'에로 연결되고, 그러한 '전체성' 안에서 그 쇼트의 의미가 나타나고, 또다시 그 쇼트가 '전체성'에 연결되면서, 결국 그 전체의 운동이 나타나게 된다. 쇼트 하나 하나가 참된 운동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그것들의 전체성과의 연결 사이에서, 열려있는 운동이 개진되는 것이다.

# 들뢰즈가 이 영화에서 본 운동은 '죽음'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술을 찾아 헤매는 한 알코올 중독자의 일상을 다룬다. 한 남자의 표정과 운동이 드러나는 쇼트들과, 술잔과 술병이 널려 있는 풍경들이 담긴 쇼트들, 침대 밑에 숨어 있는 술병의 쇼트, 술잔 안으로 따라지는 술방울들의 쇼트, 그런 남자의 파멸을 지켜보는 애인의 눈빛과 걱정들,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죽음'이라는 운동으로서의 '전체성'과 연결되고 호응한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영화가 된다. 

# 근데 내가, 나의 관점에서 발견한 이 영화의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이런 거다. 이 영화에서는 '사물'들이 독특한 위치를 부여받는다. 영화를 보다보면 가령 '술병'이나 '타자기'(이 남자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는데, 술을 마셨을 때만 글이 잘 써지는 자신의 모습에 매번 실망한다. 타자기는 이 남자의 꿈 혹은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수치감의 상징이다) 또는 '전화기'(남자는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집에 숨어있는데, 그 와중에 계속해서 애인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이것은 남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박쥐'(남자는 알코올 금단 섬망에 시달리는 와중에 박쥐의 환영을 보고 공포스러워한다)같은 것들이 오히려 주변 인물들, 가령 '바 주인'이나 '애인', '동생' 같은 캐릭터들보다 더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사물은 단순히 죽은 사물이기를 그치고, 쇼트 안에서 존재감을 뿡뿡 과시하면서 오히려 극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 이런 '사물'들은 단지 상징일까? 가령 그것들은 '초자아'의 상징(전화기)이라든지, '야망 및 그 반대극의 수치감과 열등감'(타자기), '남자의 파멸'(박쥐), '중독'(알코올)이라는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현상들을 단지 '상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물을 상징으로 치부할 경우 우리는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다루지 못하고, 오히려 사물을 항상 어떤 것의 가면으로만 다루게 된다.

# 내가 종종 '자기심리학' 개념에 매료되는 이유는 비슷한 곳에 있다. 자기 심리학은 알코올 중독자의 정신역동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는 이론 중 하나다. 자기 심리학에 따르면 어린 아이의 양육자는 selfobject 기능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데, 이것이 결핍될 경우 아이의 self는 취약해지고, 결국 그는 평생에 걸쳐 잊혀지고 상실된 selfobject를 추구하게 된다. 자기self의 파편화를 경험하는 환자들, 즉 나르시시즘에 균열을 겪는 환자들은 그러한 파편화를 메꾸고 보충하기 위해 그 자리를 보충해줄 어떤 '대상'을 선택하는데, 이 대상은 엄밀한 의미의,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이자 동시에 대상인 어떤 것으로 기능함으로써, 자기대상 매트릭스 (selfobject matrix)라는 것을 형성한다. (여기서 selfobject가 self-object가 아니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self와 object는 구별되지 않는다) 

# 그런데 자기 심리학의 독특한 점은, selfobject matrix의 구성요소에 반드시 '인간'이라는 대상만 포함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self는 자신의 결핍을 사물화된 대상에서도 충족시킬 수 있다.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 환자에서처럼,<마지막 휴일>의 주인공에게 '술'은 '자기의 일부'로 기능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사물화된 것으로서만 물러서 있지 않으며, 그것 자체로 인간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매트릭스를 형성한다. 타자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주인공의 신체의 일부로서 여겨진다. '위대한 작가가 되겠어!'라고 외치는 그의 판타지 속에서, 그라는 인간은 언제나 타자기라는 대상과 융합된 상태로 나타난다. 타자기는 그 자체로, 종종 취약한 자기를 가진 환자들이 드러내는 과대자기적 환상의 필연적인 구성요소로서 등장한다. 술이든 타자기이든 모든지 그의 신체 속에 속한다. 

# 환원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는 술과 타자기의 의미를 정확히 식별할 수 없다. 오직 사물 그 자체의 본성, 그것이 '보여지는 사물'로서 드러내는 물질적인 속성의 한계를 넘어갈 때에야 우리는 그것들의 진짜 대상으로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술병과 타자기를 백날 분해해봤자, 한쪽에서는 규소라는 원소가 나올 뿐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온갖 금속 원소들과 잉크 방울들이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분명 '타자기'를 들고가 전당포에 맡기면서 그 대가로 '술'을 교환해 돌아온다. 술과 타자기가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등가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니다. 이 교환 가능한 관계야말로, 이 두 가지 요소가 단순한 사물이기를 넘어 그에게 어떠한 존재자적 위치를 보여주는지 드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