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사적인 정리

한 철학도의 독일여행기 ④ : 베를린 – 중앙역, 유대인 박물관 (4/6)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4. 17. 17:42

중앙역

일어나보니 어제 널어 놓은 나의 속옷과 양말이 뽀송뽀송하게 잘 말라 있어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했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유대인박물관이다. 일단 중앙역으로 향했다. 중앙역에는 상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볼 것이 많았다. 처음으로 독일에서 쇼핑이라는 것을 해봤다.

역 한 켠에 붙어 있던 미란다 커의 사진. 독일에서도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어딜 가나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독일의 명물 리터 스포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상점에서 발견한 라이프니츠라는 이름의 과자. 과자 겉봉지에 익숙한 철학자의 이름이 붙어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과자에 '이황'이라고 써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상점을 지나 서점으로 들어가봤다. 만화 코너 앞을 지나가게 됐는데, 일본 만화책들이 수두룩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여기가 독일인지 한국인지 살짝 헷갈리기도 했다. 망가의 힘은 대단하다.

잡지 코너를 지나가는데 성인 잡지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을 다 드러낸 처자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성인 잡지 표지에는 가슴을 드러낼 수 있던가? 음... 아마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이번엔 동화책 코너로 가 봤는데 이런 책이 있었다. 궁금해서 내용을 살펴보니, 내가 독일어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아버지와 딸 간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아름다운 동화책 같았다.

딸 레아에게 골고루 이를 닦으라 하는 베이더 아빠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런 딸에게도

사춘기라는 것이 찾아왔으니...

딸을 빼앗기기 싫은 아빠. 남자는 한 솔로일까?

독일에 와서 느낀 이상한 점 하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이 많은가 하는 것이었다. 첫 째날, 베를리너 맥주를 마셨던 바로 그 음식점에서, 밥을 먹던 나는 우연히 창 밖에서 어떤 남자를 보게 되었다. 남자는 옷을 비교적 깔끔히 차려 입은 젊은이였다. 그닥 거지나 부랑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전봇대 옆의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는 한 손을 통 속으로 쑤욱 집어 넣어서는 이리 저리 헤집다가 빈 병 몇개를 집어 들고는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처음에 난 독일은 거지들도 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다니는가보다 했다. 그런데 중앙역에서야 그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됐다.

베를린의 상점 곳곳에는 이런 기계가 놓여 있다. 빈병을 들고 가서 저 기계에 집어넣으면, 기계에서 동전이 나온다. 이 남자는 그리 말쑥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이 이 빈병 수거기를 이용하고 있는 듯 했다.

 

 

전철을 타고 유대인박물관으로

유대인 박물관에 가기 위해 Hallesches Tor 전철역에서 내렸다. 역에서 박물관까지는 도보로 약 15분 정도 걸린다. 이 주변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사는지 제3세계 음식점 및 식료품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특히 터키나 그 주변 국가들의 음식이 많았다.

이 동네는 이상하게 다른 동네보다 훨씬 더 더러웠다. 잔디밭에도 쓰레기들이 널려 있고 거리도 지저분하다. 게다가 놀이터는 보수를 잘 안하는지 놀이 기구들이 낡아서 무너져내리려고 한다.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서 그런 걸까. 왜 항상 외국인이 거주하는 동네는 특별히 더 지저분한 걸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박물관의 입구. 다른 박물관과 다르게 경비가 삼엄하다. 거의 공항 입국 수속대 수준이다. 짐을 모두 내려놓고 저 검사 기기를 통과시켜야 한다. 왜일까? 이 유대인 박물관을 폭발시키려는 세력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도 공항처럼 금속탐지기를 내 사타구니까지 집어넣는 검사까지는 안해서 좋다.

유대인 박물관의 특징을 딱 하나 꼽으라면 난 이렇게 말하겠다 : 이 박물관... X나게 복잡하다. 건축가는 다윗의 별을 형상화시킨 모양으로 이 건물을 지었단다. 아래 사진을 보시라.

물론 이 사진, 내가 찍은 건 아니다. 난 새가 아니므로. 여하튼 이 건물의 구조는 저런 식으로 지그재그 형태로 돼 있는데... 그래, 뭐 거기까지는 괜찮다 이거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 구조도 저 건물 구조만큼이나 지그재그로 꼬여 있다는 거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저게 생긴건 지그재그처럼 생겼어도, 시작과 끝 부분이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계속 한 길만 따라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놈의 박물관의 전시 순서가 한 쪽 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중앙부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거다. 게다가 대한의 자랑스러운 건축가 "이상"의 건축양식을 본받고 싶었는지, 이놈의 건물은 1층과 2층의 구분이 거의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전시 순서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일단 관람자는 1층으로 들어간다. 1층에서 전시를 시작해 그 길을 쭈욱 따라가다보면 2층 입구가 나온다. 하지만 이 2층 입구로 들어가면 안된다. 이것은 출구지 입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람자는 2층을 지나쳐 3층으로 진행, 3층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관람을 모두 마치고 난 관람자는 어디로 나오게 될까? 딩동댕. 2층으로 나오게 된다. 나는 이 구조를 처음에 이해하지 못해서 1층 다음 2층부터 관람을 했다. 전시물을 보고 있는데 요상하게도 현대부터 시작해서 자꾸 거꾸로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는 순으로 전시가 돼 있길래 아 이 박물관 컨셉이 레트로그레이드 한 건가보다 했다. 알고보니 내가 거꾸로 관람한거였다. 제기랄...

위의 사진 처럼 사방으로 통로가 뚫려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관람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가 없다. 이 박물관 안에서 돌아다니려면 꼭 지도를 들고다녀야 한다. 근데 난 멍청하게도 지도를 봐도 방향 감각을 되찾을 수가 없어서 나중엔 구글 지도까지 켜고 다녔다.

1층의 유대인 관련 교육센터. 독일의 고등학생 세 명이 유대인의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난 처음에 이 박물관이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박물관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유대인 그 자체'에 대한 박물관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민족이며, 어떠한 역사를 가져왔고, 어떠한 문화와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 이것이 이 박물관의 주요 테마다. 건물 전체가 유대인의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하나의 덩어리라고 보면 된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하게 유대인의 정체성이 최고로 억압되고 부정되었던 독일이라는 나라의 중심부 베를린에, 이처럼 유대인의 흔적이 강렬하게 아로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고 신선했다.

이렇게 소파들이 몇 개 놓아져 있고, 그곳에서 유대인의 문화와 관련된 비디오들이 재생되고 있다. 내용이 너무 재밌어서 거기 있는 비디오들을 다 보느라 거의 삼십분 이상을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위의 사진은 유대인과 기독교 문화에 있어 성체(밀떡)의 차이를 보여주는 비디오 영상의 사진이다.

고등학교에서 현장학습을 나온 듯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열심히 무언가 설명을 하고 있다. 어딘가 대견스러운 모습이다.

옆에 특별 전시관으로 들어가보니 한 남자가 유대인 모자(나중에 찾아보니 이 모자를 키파라고 한단다)를 쓰고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인 것 같다. 진짜 깃털을 갖고 정말 오래된 듯한 잉크를 사용, 파피루스 종이 같은 오래된 종이에 정성껏 글을 적고 있다. 옆에 달린 설명서를 읽어보니 이 남자는 옛날 방식 그대로 유대교 경전을 필사하고 있는 거란다. 근데 필사의 목적은 뭘까? 유물을 복원하기 위한 걸까? 아니면 경전을 필사해서 판매하려고 하는 걸까? 갑자기 궁금즘이 물 밀듯이 밀려왔다. 왠지 이 남자는 퍼포먼스 중이라 말을 걸면 안 되는 것 같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에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지 않겠냐 걍 한 번 물어나 보자 해서 말을 걸었다.

"저... 제가 당신하고 이야기를 좀 할 수 있나요?"

갑자기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왠지 말을 건 사람은 내가 처음인 듯한 반응이었다.

"잉글리시... 노..."

"아... 괜찮아요 뭐 좀 물어보고 싶은데..."

"노..."

"오케이... 땡큐..."

거절당한 나는 풀이 죽은 채 옆에 있는 다른 전시방으로 향했다. 그 날은 관람객이 워낙 적어서 옆 방에서는 어린 여직원 한 명이 혼자서 전시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옆 방에 저 남자 있잖아... 혹시 왜 저거 하고 있는 건지 알아?"

"글쎄 나도 모르겠네 ㅎ"

"혹시 너희 박물관 전시를 위해서 필사하고 있는거니?"

"아니, 박물관을 위해서는 아니야"

"그럼 누구를 위해서지?"

"한 번 직접 물어보지 그래?"

"말 걸어봤는데 자기한테 말 걸면 안된대...일종의 퍼포먼스 중인가봐"

"헉.. 그래? 음... 아마도 저렇게 만들어진 경전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나도 잘 몰라"

역시나 이번에도 박물관 직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얘네는 뭘 알고 있는거지? 전시가 끝나고 나서 나가는 길에 복도에 있는, 왠지 전시회 안내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 중년 여성에게 다시금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역시 어떻게든 그 유대인 퍼포먼서와 대화를 했어야 했다. 젠장.

유대인 박물관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홀로코스트 타워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주 높고 좁은 직사각기둥 형태의 텅 빈 공간이 나온다. 안에는 주위의 돌 벽으로 인해 차가운 냉기가 돌고 있다. 공간 내로 들어오는 빛이라고는 저 위에 뚤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전부다.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세 뛰쳐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왠지 멍해지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하는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 한참을 안에 가만히 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건축가는 관람자로 하여금 가스실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공포를 느끼길 바랬던 걸까?

바로 옆 방에는 이처럼 울고 있는 얼굴을 형상화한, 쇠로 된 얼굴 문양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이것들을 밟으면 철커덩 철커덩 소리가 난다. 공간 자체가 텅 빈 형태로 돼 있어서 소리가 쩌렁 쩌렁 울린다. 그냥 밟기만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애써 고통당했을 유대인을 떠올리며 감정을 잡아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이 표정들은 울고 있는 표정이 아니다. 좀 애매한 표정이다. 입 모양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더 내 감정을 자극했던 것 같다.

박물관 뒤에는 정원이 있다. 마침 날씨가 좋아 풀밭 위에 몇 분 동안 누워 있었다. 분위기좀 잡아보려고 누워 있는데 한 3분 지나니까 엄청 춥다. 독일의 봄 날씨가 이렇다. 햇볕이 따뜻하다 싶어 어디에 앉으면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소름을 돋게 만든다. 결국 다시 일어나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배가 고파서 박물관 내 까페 겸 식당에 갔다. 얼마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엄청나게 비쌌다. 걍 나가서 먹을까 하다가 자꾸만 배에서 신호가 와서 그냥 앉아버렸다. 딱히 먹을 만한 게 없어서 그냥 사진에 보이는 파스타를 시켰다. 맥주를 같이 먹을까 하다가 왠지 박물관에서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는 건 좀 어색한 것 같아서 음료수를 찾기 시작했다. 왠 빨간 음료가 눈에 띄었다. 겉에는 Rhubarberlimonade라고 써 있었다. 루바브가 뭐여... 라즈베리인가? 궁금해서 직원에게 물었다.

"이거 라즈베리 음료니?"

"아니. 루바브로 만든거야"

"루바브? 그게 뭐여?"

"루바브 몰라?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직원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혼자 해결하지 못하겠는지 옆의 다른 직원에게 묻는다. 아마도 이 검은 머리의 동양인에게 루바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묻는 것 같았다. 뭐 그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외국인이 우리에게 와서 "마"가 뭐야? 라고 물어본다고 해보자.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다른 직원이 내게 와서 말한다.

"그거 이렇게 길다랗고 빨간 건데... 그거 뭔지 몰라?"

"모른다니까...음... 이거 단거야?"

"응. 달지"

"그럼 그냥 먹을게"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닥 매력적이진 않다. 달다던 그들의 말과 달리 딱히 달지도 않았다.

기념품점에 가니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대인들과 관련된 작품같은 것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난 여기 오기 전까지는 벤야민이 유대인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웃긴건 유명한 유대인들의 사진들 가운데 대뜸 찰리채플린이 껴 있었다는 것이다. 채플린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한 때 유대인으로 오인받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진짜 토박이 영국인이다.

프로이트와 맑스 관련 기념품들도 있었다. 프로이트 박물관이나 맑스 박물관보다 오히려 여기에 그들과 관련된 재미난 기념품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프로이트와 맑스 손가락 인형이나 석고로 만든 그들의 두상을 구입하고 싶었지만, 왠지 충동 구매인 것 같아 자제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세션용 사탕'만 두어 개 구입했다. (조그마한 민트맛 사탕이 들어 있는 캔인데, 겉에는 "세션이 끝날 때 마다 한 알씩 드세요" 라는 말과 함께 프로이트가 사탕 한개를 건네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이 망라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