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독일 관념론] 한자경 76~98 (독일관념론543~549에 해당)
4. 지각에서 오성으로
그러나 지각하는 의식에게는 지각활동이 담고 있는 운동 자체가 지각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은 오성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지각은 그 스스로 자신 안에 포함되어 있는 양자인 역시와 일자를 동시에 함께 생각할 수 없다. 지각 단계에서의 보편성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성이 아니라 단지 감각으로부터 추출된 감각적 보편성일 뿐이다. 즉, 지각에서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양극의 분리 속에 놓여 있는 보편성이며, 다시 말해 대립적 요소에 의해 제약된 보편성이다. "지각에서의 보편자는 감각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질적으로 감각적인 것에 제약되고 따라서 참되게 자기동일적인 것이 아니라 대립에 촉발된 보편성이다. 즉 개체성과 보편성의 극단, 속성들의 일자와 자유로운 질료들의 역시의 극단으로 분열된 것이다." 실제로 개별성과 보편성은 본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 두 계기를 자체 내에 포괄하는 보편성을 헤겔은 "무제약적 절대적 보편성"이라고 칭한다. 이 보편성을 대상으로 삼는 의식은 바로 오성이다. 오성에 이르러 비로소 일자와 역시 양자 간의 이행인 운동이 과연 어떤 운동인지, 무제약적 보편자가 과연 무엇인지가 밝혀지게 된다. "양자[개별성과 보편성 또는 대자와 대타]가 본질적으로 통일을 이루게 되면, 이제 무제약적이고 절대적인 보편성이 현전하게 되며, 이 때 비로소 의식은 참되게 오성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 J의 개념정리 |
III. 힘과 오성 : 현상과 초감각적 세계
1. 오성의 단계
지각은 일자와 역시 중 하나를 대상(객관)으로, 다른 하나를 의식(주관)으로 이원화하여 의식할 뿐, 그 둘을 통합하지 못한다. 개별과 보편의 통합, 일과 다의 운동성을 헤겔은 개별에 의해 제약되지 않은 보편성이라는 의미에서 '무제약적 보편자'라고 한다. 오성은 이 무제약적 보편자를 '대상'으로 인식한다. 이 무제약적 보편자는 타자와의 관계를 벗어나 자체 내로 복귀하는 자기복귀적 운동성으로서의 "개념"이다. 그런데 오성 단계에서는 오성이 개념을 대상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 의식 자체가 아직 개념이 된 것은 아니다. 즉 오성의식은 대상 안에서 아직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의식은 아직 대자적으로 개념이 아니며, 따라서 자체 내로 복귀된 대상 안에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념인 무제약적 보편자가 의식에 대해 단지 대상으로 나타날 뿐이며, 따라서 오성의식은 아직도 대상의식이지 자기의식이 아니다. 지각에서 밝혀진 무제약적 보편자의 두 계기는 다양하게 존립하는 속성들의 공통의 매개체(사물성 : 대타존재)와 자신에게로 복귀한 일자존재(대자존재)이다. 이 두 계기는 서로 분리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양자가 서로를 지양하면서 상대에의 이행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은 일과 다로의 상호지양과 상호이행을 자체 내에 포괄하는 보편자가 바로 무제약적 보편자이다.
오성이 개념으로 포착하여 대상으로 삼고 사유하는 이 무제약적 보편자가 바로 '힘'이다. 상호이행의 운동이 바로 힘이기 때문이다. 상호이행으로서의 힘은 양 방향으로 작용하는데, 외적 다양성의 방향으로 자신을 전개하는 힘(=발현하는 힘=일에서 다로)과 다시 그것으로부터 일자의 방향으로 자체 내 복귀하는 힘(=밀쳐진 힘, 본래적 힘=다에서 일로)이 그것이다. 이 두 힘은 그 방향이 서로 다르지만 사물이 갖고 있는 하나의 힘의 양면이다. 이 상호이행적 운동은 "두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희"이다. 오성이 대상으로 삼는 힘은 이러한 양 방향의 두 힘을 통합적으로 포괄하는 보편자로서의 힘이다. 일자(대자존재)와 다(매체,매개체, 사물성, 대타존재) 는 그러한 힘의 이행과정의 산물이다. 즉 힘의 자기 전개된 결과물 내지 힘의 자기복귀성 자체다.
힘을 내적 일자일 뿐으로 이해한다면, 내면을 외부로 표출시키고 전개시키는 것은 힘 외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런 표출 또한 힘 자체 안에 이미 갖추어진 것이다. 일자로 정립된 힘이 표출되어 드러난 것이 다양한 성질들로 표현되는 '공통의 매개체'인 것이다. 반대로 힘을 물질의 매개체라고 정립한다면, 다시 일자는 그 힘의 바깥의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표출된 힘이 지양되면서 자기복귀한 힘이 곧 일자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복귀된 힘이 곧 일자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힘이란 결국 그 스스로 외화하고 또 내부로 복귀하는 운동 자체이다. 일과 다, 사물 자체와 속성은 두 극으로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외화된 결과와 복귀된 힘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2. 오성적 사유 : 현상계와 초감각계의 이원화
1) 사물의 현상과 사물의 내면
힘은 영향을 주고 자극을 가하는 쪽과 영향을 받고 자극을 받는 쪽이라는 두 계기로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은 힘의 계기에 있어 형식상의 구별이다. 그렇지만 그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하나는 결국 다른 하나로 이행해 간다. 즉 "대립된 것에로의 직접적 이행"이 발생한다. 이렇게 힘은 형식상 독립적인 두 계기의 힘으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해 가는 힘으로서만, 즉 양자간의 운동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두 개의 힘은 대자적인 것으로서 존재하지만, 그 존재는 오히려 타자에 의해 정립됨으로써만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존재가 오히려 순수한 소멸의 의미를 갖는 그런 상호 간의 운동일 뿐이다."
헤겔은 힘에 있어서의 구별을 '내용상의 구별'과 '형식상의 구별' 둘로 구분한다. 즉 힘의 구별 자체는 이중의 구별로 나타난다. 내용상의 구별은 '자체 내로 복귀하는 힘의 극'(일자)과 '물질의 매체라는 극'(매체)의 구별이다. 형식상의 구별은 '능동적으로 유발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유발되는 것'의 구별이다. 형식상의 구별은 외화와 복귀라는 힘의 운동성의 양면을 뜻하고, 내용상의 구별은 일과 다라는 힘의 운동 결과의 양면을 뜻한다.
유발하는 힘과 유발되는 힘, 능동적인 힘과 수동적인 힘은, 두 방향의 힘이 서로 부딪치고 갈라지며 구분되는 경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힘은 각각 분리된 별개의 힘으로 따로 존재하다가 유발하는 것과 유발되는 것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간지점에서 두 힘으로 갈라지면서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두 힘은 바로 그 중간과 접촉에 있다. 자체 내로 복귀한 힘의 대자존재도 힘의 외화도, 힘의 유발하는 것도 유발된 것도 모두 다 그 중간지점에 있다. 이 두 계기들이 두 자립적 극단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일은 없다."
이처럼 상호이행과 접촉의 중간에 실제적 힘이 존재한다. 이처럼 사물의 내면 주위에서 발생하게 되는 힘의 유희가 빚어 내는 힘의 실현양태가 바로 "힘이 전개되는 장"으로서의 "현상"(Erscheinung)이다. 지각되는 세계인 다양한 속성들과 그것의 매체 또는 일자는 그 자체 실체가 아니라, 힘의 유희가 빚어 낸 모습, 즉 생겨났다가 소멸해 가는 현상이다. 오성의 힘은 이 힘의 이행의 중심으로서의 사물의 내면을 사물의 본질로 포착하고자 한다. 사물의 내면에서 사물의 법칙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현상의 본질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성은 사물의 법칙성을 감각적인 현상계와 구분되는 초감각적 실재계, "초감각적 진리의 세계"로 상정한다.
2) 초감각계의 상정
오성은 현상 너머에서 무제약적 보편자로서의 힘을 사물의 본질 내지 사물의 법칙으로 사유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상 이면의 초감각계를 설정한다. "보편과 개별의 대립을 벗어나서 오성에 대한 존재가 된 절대적 보편자로서의 내적 진리 안에 비로소 현상하는 감각적 세계 너머 초감각적 세계가, 즉 사라져 가는 차안 너머 항구적인 피안이 개시된다." 감각적으로 드러난 개별 현상에만 주목하는 감각적 확신이나 지각과 달리 오성은 사물의 내면을 자기복귀적 힘으로 의식하지만, 그 사물의 내면을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지는 못한다. 아직 스스로를 개념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개념을 대상으로만 의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성에 있어 사물의 내면은 현상 너머의 피안이며, 오성의식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 너머의 피안으로 간주된다. "의식은 아직 사물의 내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지 않으므로 내면은 의식에게 여전히 순수한 피안으로 남아 있다."
오성은 사물의 내면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세계 너머의 피안적 실재, 즉 현상독립적인 "힘의 법칙"으로 간주하며, 이 법칙의 세계를 현상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영역으로 설정한다. 즉 "평온한 법칙의 영역"으로서 초감각계를 실체화하여 설정하는 것이다. 오성에게는 이러한 법칙의 세계만이 진리로 간주된다. 따라서 오성에 있어서는 힘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세계와 다시 그러한 감각적 영역을 넘어선 초감각적 법칙의 세계가 이원화된다.
3. 초감각계의 실상
1) 오성법칙의 한계
이러한 이원론은 현상의 법칙연관성, 그리고 초감각계의 현상연관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하지만 헤겔은 현상계와 초감각계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초감각계와 현상을 본질과 그것의 발현결과라는 긴밀한 관계로 이해하면, 현상은 단지 감각적인 것 또는 지각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성법칙이 발현된 세계, 초감각계가 실현된 세계로서 진정한 의미의 내면적 세계가 된다. 현상과 오성계의 통일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근대의 과학주의 내지 오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헤겔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타나는 이원론, 즉 가시적 현상계와 비가시적 실재계의 구분을 이러한 오성차원의 의식으로 간주한다. 또한 잡다한 다양성의 요소들에 대해 그들의 관계 내지 법칙을 그러한 현상적 요소 외적인 것으로 여기는 흄이나 칸트의 철학 또한 오성의 철학으로 분류한다. 흄의 경우 다양한 감각인상들 간의 관계성은 필연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상상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관적 상상'에 의한 법칙 및 관계성은 현상의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다. 칸트의 경우 다양한 감각적 표상들 간의 관계는 감성 외적인 오성으로부터 부과되는 보편적 필연성의 법칙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도 '보편적 필연성의 법칙'이라는 것 또한 현상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의 사유는 다 현상계와 법칙계, 감성계와 오성계를 이원화하는 오성적 사유로 평가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헤겔은 표상들의 관계를 표상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표상들 자체의 본질로 간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구체적 현상에 대해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추상적 법칙의 세계에 다시 추상성이 아닌 활력과 생기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사유에 활력을 부여하고, 경직되고 고정된 오성을 자발적 활동성의 이성으로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오성법칙은 그 법칙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현상세계를 배제하고서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법칙 자체만으로는 현상계의 풍부성을 다 따라갈 수도 없다. 헤겔은 오성법칙이 현상세계의 풍부성을 다 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법칙이 현상세계의 구체성과 풍부성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어떤 현상도 갈릴레이 낙하법칙이 말해 주듯 그런 순수한 단순 낙하가 아니라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상계의 낙하에는 저항, 마찰 등의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성법칙은 단순성과 통일성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이미 결손을 포함하게 된다. 오성은 통일성의 요구에 따라 많은 법칙을 하나의 법칙으로 귀결시키고자 하며, 그렇기 때문에 오성법칙은 각각의 개별 법칙들이 지니는 자기규정성을 상실하고 결국 피상적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갈릴레이의 낙하 원칙과 케플러의 천체운동의 원칙이 뉴턴의 중력의 법칙, 즉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통일됨으로써, 만유인력의 법칙은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이되 그 자체 아무런 규정적 내용을 갖지 못하고 단지 "법칙 자체의 개념"만을 주장할 뿐이다.
(J :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다. 오성은 개별 법칙에서 더 보편적인 법칙으로 통일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개별 법칙이라는 건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이 때, 생각의 편리를 위해, 일단 이 세계의 모든 마찰은 무시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즉, '마찰의 무시가 전제된 상태'에서 개별법칙->보편법칙 으로의 추상화를 고찰해보자는 것이다. 한 학자가 지구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에 가해지는 힘을 법칙화 했다. 그에 의하면 F=m x 9.8 이다. 다른 학자가 우주선을 타고 달에서 같은 자유낙하 실험을 행한 결과, F=m x 1.6 라는 법칙을 얻었다. 이를 보고 한 학자가 두 결과를 종합해 F=mg 라는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더 보편화된 법칙인 F=mg 는 그 자체로서는 사실 아무런 규정적 내용도 담지 못한다. 여기서 자유낙하 가속도는 단지 g라는 기호로서 표현되고 있을 뿐, 사실 이 기호 g자체 내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지구에서는 이 g의 크기가 9.8에 해당된다는 '현상'에 속하는 정보를 알고 있지 못하는 한, 이 법칙을 가지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같은 논리로 다른 예를 들어보자. 케플러가 행성 간의 운동을 관찰한 결과, 타원의 장반경의 세제곱은 공전주기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보자. 즉 a^3은 p^2에 비례한다. 이 공식은 행성간의 관계에만 통용되는 거라, 지구 상의 물체 상에서는 이러한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뉴턴은 갈릴레이의 주장, 즉 '자유낙하하는 물체는 마찰이 없는 한 질량에 관계 없이 같은 가속도를 갖는다는 법칙'과, 케플러의 법칙을 통해 '모든 물체에 대해 적용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고안해 낸다. 그에 의하면 F=GMm/r^2 이다. 이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부터는 케플러의 법칙과 갈릴레이의 법칙을 모두 유도해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 이 만유인력의 법칙 '자체'는 그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법칙만 갖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가 없다. 이 법칙 자체는 지구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경우 GM/r^2의 크기가 9.8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또는 천체의 운동에 있어서 GMm/r^2은 구심력인 mv^2/r 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또 이 구심력은 mrw^2으로 표현되며 동시에 각속도w는 2파이/T라는 사실 또한 말해주지 못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다른 정보들을 갖고 있어야지만 보편적 법칙인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용할 수 가 있는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 자체는 사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 그 법칙은 힘 간의 관계의 필연성만을 정립할 뿐 그 이상의 규정, 예를 들어 왜 힘이 이런 저런 특수한 구별 속에 표출되는 것인지, 왜 중력은 물체로 하여금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낙하하게 만드는지 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와 같이 현상계와 오성계를 이원화해서 이해하면, 추상적 법칙은 구체적 현상을 다 포괄하지 못하며, 그렇게 이해된 법칙은 활력과 생기를 잃고 만다. 헤겔은 이원화를 극복하고 오성에다 활력을 주기 위해서, 법칙의 운동성을 법칙적 설명의 운동성으로 해명하고 다시 그런 설명의 운동성을 오성의 자기운동성으로 밝힌다.
2) 오성적 설명의 구조
헤겔에 따르면 오성이 현상 자체의 법칙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실제로 오성 자체의 법칙성일 뿐이며, 그 법칙성이 현상을 설명할 뿐이다. 즉 오성이 법칙의 형식으로 자체 내에 구별의 계기를 설정하고 다시 그렇게 설정된 구별을 법칙 자체로써 지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에 있어 양전기와 음전기의 구별은 실제 전기 자체에 있는 구별이 아니다. 그것은 설명을 위해 요구된 필연성이지, 전기 자체가 가지는 필연성은 아니다. 그 구별은 결국 오성이 만든 구별이다.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 시간과 공간, 거리와 속도 같은 구별도 마찬가지다. "[전기와 운동] 두 경우에 다 어떤 구별도 즉자적인 구별이 아니다. 이 구별을 '내적 구별'이라고 하는 것은 법칙이 단순한 힘 또는 법칙의 개념이라는 것, 즉 개념의 구별일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내적 구별은 오직 오성 안에만 있을 뿐 사태 자체 안에 정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구별이 사태 자체의 구별이 아니므로 그 구별은 다시 지양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구별을 만들고 다시 구 구별을 지양하는 과정이 곧 "설명"이다. 예를 들어 잎은 왜 녹색인가? 잎과 구분되는 엽록소를 설정함으로써 이 현상을 설명한다. 일단 잎이 곧 엽록소인 것은 아니다. 둘은 다르다. 하지만 잎에 엽록소가 있고 엽록소가 녹색이므로, 잎은 녹색이다. 그러나 실제 현상세계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잎과 엽록소 그리고 녹색은 서로 구별되지 않고 잎의 엽록소의 녹색으로서 함께 존재한다. 이처럼 오성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현상의 요소를 구별하며 다시 그 구별을 지양한다.
번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번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번개와 구별되는 전기라는 것을 이용한다. 즉 일단 번개 '현상'과 그 현상의 근거로서의 '전기의 법칙'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즉 설명항인 전기와 피설명항인 번개가 다른 것이 아니라면, 설명항에 이미 피 설명항이 들어 있어 바른 설명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명은 그렇게 설정된 그 구분을 다시 지양함으로써 완성된다. 즉 피설명항인 번개가 사실은 전기와 다를 바 없다고, 즉 번개는 전기 방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오성의 설명과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현상과 구분되는 법칙을 설정한다. 즉 현상과 법칙을 구별한다. 그리고 나서 그 법칙에 따라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구별을 지양하는 것이다. 이처럼 구별을 정립하고 다시 그 구별을 지양하는 운동이 바로 오성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오성은 법칙을 통한 현상의 설명구조 속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오성의 법칙이 곧 오성 자신의 운동인 것이다. "설명의 운동을 통해 사태 자체에는 어떤 새로운 것도 생겨나지 않고, 운동은 오직 오성의 운동으로만 고찰될 뿐이다." 이처럼 생성과 변화의 운동은 현상계의 운동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 세계의 법칙이며, 그 법칙은 곧 법칙을 설명하는 오성 자신의 운동의 법칙인 것이다. 이로써 오성이 포착하는 초감각계의 실상은 다시 전도된다.
3) 전도된 세계
설명이 오성 자신의 설명과정이라는 것은 곧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하는 오성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J : 그러나 이것이 실재는 가만히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오성만이 그것을 자기 멋대로 조합하고 형성한다는 의미에서의 '주관적 관념론'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를 주의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추상화된 고요한 오성법칙의 세계와 변화하는 현상계와의 이원성은 지양된다. 우리의 사유가 머무는 오성세계는 생명 없이 정지한 고요한 세계 또는 현상의 피안이 아니다. 초감각적 세계의 본질은 고요한 사물의 내면, 고요한 법칙의 왕국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는 운동의 세계이다. (J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초감각계가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와 동일한 것인가? )
헤겔은 이처럼 사물의 내면을 현상의 피안이 아닌 현상과의 연관하에서 현상화의 핵으로 간주한다. 헤겔은 칸트가 소극적 의미의 누메논(가지계)에 대해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주장한 것을 비판한다. 칸트에서처럼 초감각계가 현상 피안의 어떤 것, 사물 자체, "사물의 내면"으로서 정립되면, 거기에는 "공허"만이 남겨질 뿐이며, 따라서 아무것도 인식될 것이 없게 된다. (J : 이를테면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것만 갖고는, 그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아무것도 인식될 것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러한 내면세계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인간의 인식능력인 이성의 한계인 듯이 설명하는 것은 마치 깜깜한 밤이나 백야 상태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보는 자가 맹인이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처럼 사태의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우리가 현상만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실재 자체가 현상이라는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물은 우리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단지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칸트가 현상 너머 물자체를 한계개념으로 떠올린 것은 인식자와 인식대상을 이원화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칸트가 사물의 내면을 현상의 피안, 불가지의 대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며, 결국 자연인식에 함의된 자기인식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상지가 결국은 자기지라는 것(J : 이렇게 현상지=자기지 가 되면 곧 인식대상과 인식자의 구별이 없어지나?)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의식이 대상의 반성과 자신의 반성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오성이 자신의 반성을 실체화시킨 탓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칸트가 그 자신의 비판철학에서 사용했던 반성이 보다 철저하게 자기 스스로를 반성했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이전에는 내면의 바깥인 현상에만 있었던 변천과 변화가 이제 설명에 의해서 초감각적인 것 자체에까지 침투해 들어간다. 우리의 의식이 대상으로서의 내면으로부터 벗어나 반대 측면인 오성으로 이행해 가면서 오성 안에서 변화를 갖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변화하는 현상계의 피안으로 생각되던 고요한 법칙의 왕국으로서의 초감각적 오성계가 오히려 그 자체 스스로 구별을 만들고 다시 그 구별을 지양하는 운동성의 세계로 밝혀진다. 최초의 초감각적 세계는 현상계 너머의 정지의 세계로 여겨졌지만, 이제 운동의 실상을 통해 드러난 제2의 초감각적 세계는 스스로 변화와 변천을 갖춘 세계로서, 최초의 초감각적 세계에 대해 전도된 세계가 된다.
"그렇게 해서 내면은 곧 현상으로서 완성된다. ... 최초의 법칙의 왕국은 변천과 변화의 원리를 결여하고 있지만, 전도된 세계로서의 법칙의 왕국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 또한 최초의 초감각적 세계와 제2의 초감각적 세계 간의 전도성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도된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첫 번째 세계에서 동일류의 것이 자기 자신과 비동일적인 것이고, 비동일적인 것이 그 자체와 비동일적이거나 아니면 [그래서 결국] 자신과 동일적인 것이 된다. 특정한 요소로서 보면 첫 번째 세계의 법칙에서 단 것이 전도된 즉자에서는 시고, 저기에서 검은 것이 여기에서는 희다. ":
( J : 전도된 세계에 대한 내용은 김정현의 석사 논문 참고하기)
이렇게 해서 전도된 세계에서는 내면과 외면, 정지와 운동이 더 이상 이원화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다. 전도된 세계를 통해 헤겔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질적인 두 사물 간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대립과 구별이 실제로는 각각의 사물 자체의 내적 차이라는 것이다. 표면상의 외적 구별과 대립은 실제로 내적인 구별에 근거한다는 것. 대립항은 그 자신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안에 함께 하는 대립항이다. 외적 차이와 대립은 본질적으로 내적 차이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성은 자신의 대상 또는 자신의 대립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며, 결국 구분된 둘은 하나로 통합된다. 자신의 반대와 대립을 자신 안에 자신의 구별로서 포함하고 있는 것, 자신 안에 동일성과 비동일성,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는 것,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자기 아닌 것과 구별하되 다시 그 구별을 지양해 나가는 것, 이러한 무한자를 우리는 '생명'으로 발견한다.
4) 무한성과 생명
무한성은 한계를 갖지 않는 것, 자기 한계 바깥에 자신의 대립물을 갖지 않는 것, 즉 대립물을 자신 안에 지니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되 다시 그 한계를 스스로 넘어서는 것은 그것이 자기 한계에 갇힌 유한한 것이 아니라 자체 내에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성을 지님으로써만 가능하다. 한계를 설정하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곧 한계의 부정이며, 한계 없음인 무한이다. 이처럼 구별과 대립을 자체 안에 포함하면서 스스로 구별하고 다시 그 구별을 넘어서는 무한운동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헤겔은 이 무한운동자를 '생명', '세계의 영혼' 또는 '만물 안의 혈기'라고 부른다. 생명은 자신 안에 온갖 구별 요소를 간직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자기 아닌 것으로 변화해 가며, 그러면서도 언제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생명체의 양분화는 곧 자기이분화이며, 생명체가 행하는 구별은 곧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내적 구별일 뿐이다.
4. 의식에서 자기의식으로
그런데 오성은 무한성을 자신의 활동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오성은 동일자가 자기 자신을 대립으로 구별하는 행위와 비동일자가 다시 그 대립을 지양하는 행위를 두 개의 세계 또는 두 개의 실체적 요소로 분할하는 것이다. (J : 말하자면 오성은 어떤 '구별'자체를 사실은 자기가 만든 것이라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 즉 남자와 여자라는 구별 자체가 사실은 자기에게서부터 초래된 구별이라는 걸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
스스로 구분을 설정하고 다시 그것을 지양하는 운동성을 의식 자신의 운동성으로 자각하는 의식은 더 이상 오성이 아닌 다음 단계의 의식이다. 그것은 자신이 설정한 구별과 대립이 바로 자기 자신의 내적 구별이고 대립이라는 것, 자신의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한 의식, 즉 대상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그것을 바로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는 의식인 '자기의식'이다. "무한성의 운동이 바로 그런 것으로서 마침내 의식의 대상이 될 때, 의식은 '자기의식'이 된다. 무한성의 개념이 의식에게 대상이 됨으로써, 의식은 차이의 의식이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차이의 지양의 의식이기도 하다. 의식은 그 자체 대자적이다. 의식은 차이나지 않는 것의 차이 또는 자기의식이다. 나는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구분하며, 그럼으로써 그 구별된 것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자기의 구별인 자기 대상 안에서 다시 자기를 발견하는 의식, 따라서 모든 구별이 내적 구별이며 사실은 구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의식이 바로 자기의식이다. 스스로 구별하고 그 구별을 지양하면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가운데 자신의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