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독일 관념론] 538~543
3. 의식의 현상학
"최초에 또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대상이 되는 지는 그 자체 직접적인 지, 직접적인 것 또는 존재자의 지 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헤겔은 이것을 감각적 확신이라 부른다. 대상은 자아에게 어떤 "이것"으로서 그 풍부한 규정성에 있어서 주어진다.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가장 풍부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 인식은 "대상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제거하지 않았고, 대상을 그 일체의 완전성에 있어서 자기의 목전에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식은 '이것'이 사실 '이것'인 것으로 보였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란 것은 전적으로 추상적인 보편자인 것이다. 각각의 대상은 전혀 구별되는 일도 없이 모두 "이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대상에게 공간적인 "여기"와 시간적인 "지금"이 귀속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호 속에 충만된 내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호들의 충만된 내용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적 확신은 오히려 "가장 추상적이고, 빈약한 진리임"을 경험한다. 감각적 확신은 분명히 구체적인 것을 그것이 풍요롭다고 "사념한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은 "여기", "지금", "이것"이라는 지시를 통해서는 이 감각적 확신이 사념하는 그것을 적중시키지 못한다. "여기", "지금", "이것"이라는 지시는 내용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이 되풀이될 뿐이다. 우리는 그때그때의 내용을 언표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이 내용이 언표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념되는 감각적인 이것은 의식, 즉 자체적인 보편자에 속하는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지도 변한다. "진리의 힘"은 규정 속에서가 아니라, 사념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사념은 자아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고, 또한 이 일은 자아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각각의 자아는 각각의 사념 속에 꽂혀 있고, 다른 자아의 사념 역시 저 동일한 지시들(이것, 여기, 지금)로써 다른 것을 표명하기 때문에, 사념의 차별화 및 주관의 차별화는 사라지게 된다. 즉 거기에는 보편자로서의 자아만이 남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대상을 "이것"으로 칭함으로써 사실은 그것을 언표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자아에 대해서도 동일한 언표 불가능성과 추상성, 그리고 동일한 무규정성을 얻게 된다. 즉 의식은 자기의 대상에서 경험했던 동일한 변증법을 자기 자신에 있어서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확신은 그것의 본질이 대상 속에도, 자아 속에도 있지 않고, 또 직접성은 대상의 직접성도 자아의 직접성도 아님을 경험한다." 여기서 감각적 확신은 그것 자신, 즉 감각적 확신이 그것이라고 사념했던 것을 지양하고 사물의 지각으로 전진해 간다.
사물의 지각
한 : 감각적 확신은 '이것'으로써 구체적 개별자를 직접 지시하고 인식한다고 여기지만, 실제 '이것'으로 지칭된 것은 모든 사물이나 모든 자아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자일 뿐이다. 이 사실을 자각한 의식은 대상을 더 이상 직접적 확신의 방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를 통해 파악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의식을 지각이라고 한다. "직접적 확신(=감각적 확신)은 진리를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직접적 확신의 진리가 보편자인데도 직접적 확신은 [개별자로서의] '이것'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독 : 여기서 지각은 감각적 확신이 성취하지 못한 일을 행한다. 지각(Wahrnehmung)이란 그 자신이 진리(das Wahre)를 "붙잡는 것"(nehmen)을 이르는 말인데, 실로 진리를 보편자로서 붙잡는다. 이제 대상은 "사물"이 된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것, 즉 사물의 "성질들"이 공존한다. 사물은 '지금'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순간들의 교체 속에서 머무르고 있다. 즉 그것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공간 속에서는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는 '여기'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성질들은 사물 속에서는 "매체" 속에서처럼 서로 삼투해 있고, 또한 그러한 한에서 서로 부정적으로 협조한다. 개별적인 성질 그 자체는 서로 무관하다. "감각적인 것은 이렇게 그 자체 여전히 현존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 확신 속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즉 사념된 개별자(J : = 개별자로서, '이것'이라고 지시된 것)로서가 아니라, 보편자로서, 또는 자신을 성질로 규정하게 되는 그러한 것으로서 현존하고 있다."
한 : 여기서 이제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대상은 주관과 객관으로 이원화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본질과 비본질의 구분이 성립하게 된다. 지각에서 본질로 여겨지는 것은 지각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불변적으로 여겨지는 대상인 사물 자체이며, 그 대상을 지각하는 의식운동인 지각의 활동 자체는 비본질로 간주된다. 지각에서는 그 대상이 되는 사물을 감각적 확신에서처럼 단적으로 직접 안다고 여기지 않고 사물을 보편적 속성을 통해 알게 된다고 여긴다. 여기서 지각대상이 되는 사물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계기를 갖게 된다.
사물의 두 계기
지각은 감각적 확신처럼 사물을 그냥 그 자체로 직접 안다고 여기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을 그 사물이 가지는 속성들을 통해서 안다고 여기는 의식이다. 즉 단순히 '이것이 있다'를 아는 의식이 아니라, '이것은 이런저런 것이다'라고 아는 의식이다. 여기서 '이런저런 것'에 해당하는 것이 사물의 속성이고, '이것'에 해당하는 것이 그런 속성들을 가지는 속성의 담지자로서의 사물자체이다. 여기서 사물은 속성들의 결합과 사물 자체라는 두 계기를 갖게 된다. 이 두 계기를 헤겔은 '무관심적 역시(Auch)' (=속성들의 결합에 해당) 와 '배타적 일자(Eins)' (=사물 자체에 해당) 라고 칭한다.
(J : 참고지식 – 독일어에서는 "A그리고 B도 역시"라고 할때, Auch(아우흐)라는 단어를 쓴다. 즉 Auch=also 같은 뜻)
'무관심적 역시'에 대해 알아보자. 속성들 상호 간에는 서로 간섭하지 않은 채 동일한 '여기'에 함께 모여 있는 상호 무관심적 관계가 성립한다. 색과 모양, 감촉과 향기 등은 서로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랗다'는 것은 이 책의 노란색일 수 도 있고, 저 꽃의 노란색일 수 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속성은 보편자적 성격을 갖는다. '사물'이라는 것은 그런 상호무관심적인 보편적 속성들이 동일한 시공간인 '여기'와 '지금'을 차지하고 함께 모여 있는 장 내지 매개체(Medium)일 뿐이다. 사물의 사물성은 다양한 속성들의 단순한 함께 함을 뜻할 뿐이다. 이런 보편적 속성들의 장으로서의 사물을 헤겔은 '무관심적 역시'라고 칭한다. "이 '역시'라는 것은 순수 보편자 또는 매개체이며 속성들을 통합하는 사물성이다"
그렇다면 '배타적 일자'란 무엇인가? 노랗고 둥근 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공은 빨간 색이 아닌 한에서 노란 색아고, 또한 네모난 모양이 아닌 한에서 둥근 것이다. 이처럼 사물은 대립되는 것을 부정하는 배타성을 통해 하나의 '배타적 일자'로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지각이란 일단 지각자와 지각대상을 분리하고, 다시 지각대상에 있어 속성들의 결합(상호 무관심적 역시)과 사물 자체(배타적 일자)를 구분하면서 그 안에서 사물을 아는 의식이다.
지각의 실상 : 순환운동
헤겔에 의하면 일자와 역시 사이를 오고 가는 의식의 운동이 곧 지각의 본질이다. 일단 처음에 지각하는 의식에 대해 대상은 순수한 일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지각하는 의식은 다시 곧 일자적 대상의 다양한 보편적 속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J : "음, 이 공은 노랗고 동그랗군!") 이 보편적 속성을 통해 사물은 상호 공통성을 갖게 된다. (J : 이 공도 노랗고 동그란 공이고, 저 공도 마찬가지로 노랗고 동그라니 이 공과 저 공은 공통적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뜻인 듯) 뒤이어 역시에서 일자로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지각하는 의식은 사물의 속성을 통해 대상을 의식하지만, 그러면서도 다시 사물 자체를 서로 간의 공통성이나 연속성(J : 비슷한 공들 사이의 공통성을 의미하는 듯) 이 아닌 바로 그 사물 자체인 배타적 일자로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뒤이어 다시 일자에서 역시로의 운동이 일어난다. 배타적 일자에 머무르던 지각하는 의식은 다시 여러 속성들이 역시의 관계로 묶여 있는 매체에로 향하게 된다. (J : 이 '매체'라는 것은 그 안에 여러가지 속성들이 상호 무관심하게 담겨 있는 그런 것임) "그러나 대상을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만 파악한다면, 옳게 지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은 연속성 일반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보편적인 공통적 매체이다."
이처럼 지각의식(=지각하는 의식)이란 일자를 그 대상(본질)로 여기다가도 다시 거기서 벗어나 그 속성들의 집합(매체/역시)을 본질로 삼기도 하고, 또 그 반대의 과정을 겪기도 하는 "순환과정"의 의식이다. "지각은 단순히 순수한 수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용이면서 동시에 진리를 벗어나 자체 내로 복귀하는[반성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지각이란 일자와 역시를 동시적으로 인식하는 의식활동임을 말해 준다.
사물 자체(객관적 실재)와 현상(주관적 착각)의 구분 :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
즉 '지각'이라는 것은 그 자체 순환 내지 자기복귀적인 운동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각은 그러한 순환성과 자기복귀성을 자신의 본질로 자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운동 안에서 매개되는 양면은 각각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간주된다. 즉 지각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의식이라고 여기며, 지각대상을 지각의식과 무관하게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J : 그런데 여기서 의식은 지각 과정에 있어 여러가지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들은 사실은 모순이 아니지만, 지각이 자기 스스로를 지각의식과 지각대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모순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지각은 어떻게 하는가? 지각은 그 모순의 근원을 지각대상 안에서 찾는다. 즉 지각대상을 현상과 사물 자체로 분리한 뒤, 이 모순성을 현상과 사물 자체 사이의 모순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각의 운동성 안에 포함되어 있던 사물의 양면성은 배타적 일자와 상호 무관심적 역시이다. 지각 안에서 이 양면성을 발견한 반성적 의식은 그 둘을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면서, 그 중 어느 하나를 대상 자체인 객관적 진리로 간주하고 남은 하나를 그 대상을 변형시키는 주관적 허구와 착각으로 간주한다. 둘 중 어느 것을 객관적 진리로 여기는가에 따라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이 있게 된다. 첫 째는 일을 실재로, 다를 기만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사물 자체는 소것ㅇ에 대한 배타적 일자일 뿐이며, 다양한 속성은 주관적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일자로서의 사물의 배타성을 주장하려 해도, 그 배타성은 단순히 일자로부터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일자인 경우 일체는 서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배타성은 오히려 규정성에서 오는 것이며, 사물의 규정성은 사물의 성질들이 서로 구별되는 성질이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입장이 성립하게 된다. 두 번째 입장은 다를 실재로, 일을 의식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대상 자체는 속성으로 존재하고 그들을 종합하는 단일한 사물 자체인 일자는 주관적 구성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자 내지 개별자가 허구라면, 왜 모든 인간이 다 그런 허구를 만들어 내며, 왜 우리는 실재하는 다양성을 그러한 허구적 일로서 종합한단 말인가? 이렇게 해서 다시 속성들을 통합할 일자가 사물 자체라는 관점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자체와 현상, 객관과 주관의 구분의 지양
지각하는 의식과 지각되는 대상을 이원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곧 일자와 역시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일자와 역시를 분리시킴으로써 하나를 대상에 귀속시키고 다른 하나를 의식에 귀속시켜서 객관적 대상 자체와 주관적 의식의 기만, 물자체와 현상이라는 이분법을 낳는 것이다. 헤겔은 지각이란 일자에서 역시로 그리고 또 역시에서 일자로 이행해 가는 자기복귀적 운동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이원성은 의식의 자기복귀성과 운동성을 통해 극복된다. 이렇게 해서 지각에서 대상과 의식으로 양분해서 생각했던 것이 실은 지각 대상 자체가 가지는 양 측면이라는 것, 지각의 대상이 바로 그런 운동 자체라는 것이 밝혀진다. (J : '지각'의 단계에서는 아직 '오성'의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 자신이 이 운동의 일부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나? 그래서 '지각의 대상'이 '그런 운동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인가?) 결국 대상 자체가 일과 다, 일자와 역시, 사물과 의식의 이중성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자와 역시가 모두 대상 자체가 가지는 이중성으로 간주된다. 역시는 감각적 성질을 통해서 스스로를 표출하는 물성의 계기로서 사물의 '대타적 존재'의 측면을 이룬다. 사물은 속성을 통해 우리 의식에 들어온다는 의미에서 '의식에 대한 존재'로서의 대타적 존재이며, 또 속성을 통해 다른 것들과 관계되고 비교되고 부정되기도 하는 관계 내 존재이다. 일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다양성을 배척하는 단일한 사물의 계기로서 사물의 대자적 측면이 된다. 사물은 일자로서 자신으로 복귀한 존재이며, 일자는 사물의 개체성의 측면이 된다.
'지각의 참된 대상'은 대상과 의식으로 분할되는 운동 자체이다. 즉 양자(대상과 의식)간의 상호이행작용이 바로 지각하는 의식의 운동이며, 지각의 대상 또한 지각과 마찬가지로 자기복귀적 운동성으로서 존재한다. 사물의 양면성이 지각에서는 대타존재와 대자존재의 양면성으로 등장한다. 지각은 그 양면성을 대상과 의식 각각에게 돌리지만, 실제 대상이든 의식이든 모두 자기부정성을 자체 내에 지닌 운동으로 존재한다. 스스로 차이를 만들고 다시 차이를 넘어서는 변증법적 운동의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의식과 대상 둘 다 역시에서 일자로, 다시 일자에서 역시로 오가는 운동성의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