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 [독일 관념론] 527~532
이렇게 의식의 진보와 함께 의식의 척도가 발생한다. 즉 의식과 척도는 함께 진보하낟. 이처럼 의식 자체뿐만 아니라, 대상과 척도도 그 속에서 용해되는 이 전체의 "변증법적 운동"이 "본래적으로 경험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변증법이라는 것이 새로운 의식 속에 새로운 대상이 계속해서 생기는 과정이라면, 변증법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성에 맡겨진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변증법은 어떻게 확실하게 하나의 최종 항을 향하여 상승할 수 있는 것인가?
학문이란 운동이다
"의식의 형태의 전체적 연속"을 안내하는 내적 필연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의식에게는 연속하는 현상 속에서 현상으로서 함께 주어지지는 않는다. 의식은 "그것이 의식에게는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의식이 아는 바 없이 생기는 새로운 대상의 발생"을 본다. 그런데 여기서 이 발생 그 자체의 필연성은 "우리들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의식의 등 뒤에서 진행되는 것" 이다. 이 필연성은 과연 의식의 즉자태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의식에 "대해서"는 아니다. "발생하는 그것의 내용은 의식에 대해서 있지만, 우리들은 그것의 형식적인 것, 또는 그것의 순수한 발생만을 파악한다." 여기서 "우리들"이라는 개념은 철학자를 뜻한다. 말하자면, 발생을 추구하면서 이 발생의 필연성도 파악하는 그곳에 철학의 가능성이 놓여 있는 것이다.이 필연성을 통해 학문에 이르는 길 그 자체가 이미 학문이며, 그것은 곧 의식의 경험의 학문이다.
헤겔은 "학문의 생성"을 어떻게 이해된 것으로 보는가? "최초에 있는 그대로의 지 또는 직접적 정신은 정신이 상실된 것, 즉 감각적 의식이다." 여기서부터 학문에 이르기까지 "긴 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길을 추적하는 학문 역시 우선 정신에 대해서 잘못된 입장에 있다. 이 학문은 정신을 자기 바깥에서 "비현실성의 형식 속에 있는 것으로" 갖는다. 이 학문은 자신을 이 길에 포함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학문 그 자체는 정신의 형태화의 형식이요, 따라서 정신은 계열 속으로 함께 포함된다. 학문은 정신의 전개에 관한 지이고, 그 자체 전개되는 정신이다. "자신을 정신으로서 전개된 것으로 아는 정신이 학문이다."
만약 학문이 전개되었다면, 정신이 지의 대상이기도 하고, 지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초에는 이 양자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주관은 여기서 이미 "실체"이고, "절대자"이지만, 아직도 그 자신을 실체로서 알지 못한다. 여기서 주관이 자기의 등급에 따라서 자기의 대상과 행하는 "경험"이란, 대상이 언제나 다시 어떤 타자로서, 즉 의식이 대상이라고 간주했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증명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식이란 정신이-자기-자신을-오인함이다. 정신이 자기 자신에의 도달, 또는 정신의 완전한 자기 인식은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분화 또는 "그 자신 타자로 됨"을 넘어서서 멀리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 멀리 돌아가는 길에서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 나타난다. (J : 즉 이분화된다) 그러나 이 분리는 참된 것이 아니기에, 이 분리에는 의식의 불안정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이 의식은 결코 자존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 불안정이란 의식에게 있어 자기의 대상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자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경험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대상이 의식에게 대상 그 자체로서 현상하지 않는 한, 대상은 의식일 수 없다. 따라서 대상의 인식이 정신의 자기 인식과 일치하지 않는 한, 즉 대상의 즉자 존재가 그것의 대자 존재와 일치하지 않고, 또 동시에 "즉자 대자적인 존재자"로서 입증되지 않는 한, 대상은 실제로 인식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주관이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이와 같은 주관의 불완전한 형태들의 계열을 통한 이분화와 매개를 필요로 한다면, 과정의 중요성은 엄청 큰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과정은 바로 정신의 참된 본질에 함께 속하는 것이며, 정신의 새동성이다. 그리하여 "진리는 전체이다." 의식은 과정의 시작도 종말도 아니고, 과정 그 자체이다. 정신의 "진리"는 결과를 함께 포함한 정신의 과정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결과라는 것은 다만 과정의 "단계들"이 그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현상학 속에서도 단계들은 본질적인 것이고, 또 보존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상은 그것의 목적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상론하는 가운데서 충분히 다 논의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현실적인 전체가 아니고, 생성과 더불어서 비로소 현실적 전체이다. 경향성만으로는 아직도 현실성을 결여해 있는 단순한 충동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이, 독립적인 목적은 생동성 없는 보편자에 지나지 않는다. 발가숭이의 결과는 경향성을 자기 배후에로 밀쳐버린 시체와 같다" 이런 한에서 학문의 생성은 이미 그 자체 학문이다. 그리하여 학문은 체계이다.
그에 의하면 철학이 다루어야 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과 비현실 적인 것", 즉 발가숭이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다. 또한 철학은 공허한 개념이 아닌 "자기의 개념 속에서 정재(본질적 존재에 대립하는 구체적ㆍ개별적 존재)"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정재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실재적 실현이라는 사실 때문에 공허한 개념으로부터 구별된다. 이 실현은 "자기의 계기들을 산출하고, 또 편력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종말이 아니라, "전체의 운동"이 "긍정적인 것과 그것의 진리"의 내용을 이룬다.
이 운동 속에서 단계들은 서로 부정적인 관계에 있고, 아래 단계가 지양되어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른다. 따라서 과정이란 것은 긍정적인 것과 똑같이 부정적인 것을 자신 속에 포함해야 (J :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주제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고 보존되는 한에서, 그 자체 긍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부정적인 것의 의미는 그것의 추진 원리 및 언제나 자신을 초월하며 운동하는 그것의 역할에서 발생하게 된다. 의식은 포착했던 것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즉 의식은 각 단계에서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대상 속에서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부정은 의식을 새로운 포착에로 안내해 간다. 새로운 포착은 다시 그것의 고유한 새롭고 보다 높은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의식의 이 생동적인 운동의 핵심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부정적인 것의 힘"이다. 진리는 바로 과정의 생동성이고, 따라서 부정적인 것은 의식의 본질 속에 있는 중심적인 계기이다.
부정적인 것의 무서운 힘
부정적인 것의 힘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우리가 어떤 표상을 분석하면, 그로써 이미 우리는 "표상의 숙지된 상태의 형식"을 지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성의 노동"이다. 이것은 오성의 "가장 놀랄 만한 힘"이며 "절대적인 힘"이다. 요소들의 공존 상태는 주어진 것이고, 그 점에 있어서 그 상태는 "놀랄 만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요소가 연관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의 힘이다.
헤겔은 이 사정을 죽음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죽음은 삶의 부정이다. 그런데 이 때 "정신의 삶이란 죽음을 두려워하고, 폐기를 순수하게 막아 내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죽음을 견뎌 내고 죽음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정신은 부정을 거부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삶과 힘이 아니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직면하고, 부정적인 것에 머묾으로써만 정신인 것이다. 이 머묾은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력이다." 부정적인 것이 존재로, 즉 긍정적인 것으로 역전하는 것은 달리 말해 과정의 진보, 즉 형태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 역전 속에는 주관 그 자체의 실질이 놓여 있다.
매개라는 것은 이분화를 초월하는, 자기 자신의 파악으로 되돌리는 길이다. 길이란 형태들을 편력하는 과정이다. 이 길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의 힘"은 삶과 추진력의 계기이다. '결과'속에 이 삶의 다양성은 함께 받아들여져 있다. 그런데 결과는 형태들의 총괄이다. 따라서 결과는 이분화와 매개를 자신 속에 갖고 있는 "매개된 직접성"이다. 사라짐은 본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지양은 보존이다. "고정된 것이라는 규정"은 비진리이고, "죽은 긍정적인 것"이다. (J : 규정=긍정적인 것 이었기 때문?) 부정적인 것을 자기의 본질 속으로 포함함으로써 비로소 긍정적인 것은 진리로 된다. 자기의 생성을 포함하는 존재가 비로소 진정한 존재인 것이다. 과정을 전적으로 자신 속에 갖고 있는 결과가 비로소 고정되고 안정되어 있는 결과이다. 왜냐하면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 그 자체는 발생하고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가 지닌 생명의 현실성 및 운동"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상학의 독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주관이 자기의 대상 및 자기 자신과 함께 행하는 그런 순수한 경험이 문제가 된다면, 서술된 재료 역시 내적 경험으로부터 순수하게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면적으로 발견된 것의 분석 외에 우리에게는 역사적 재료라든지, 시대의 정신적 경향, 정의감 및 국가관, 도덕, 종교, 세계관이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주어지거나 주관의 고유한 경험에 속한다고 말하기 힘든 재료들이다. 이 재료들은 일정한 학습과 역사 연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