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글들/[독일 관념론 정리]

J : [독일 관념론] 467 ~ 481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3. 12. 19:45

 

칸트와 헤겔

칸트는 형이상학에 이르는 통로를 우선 실천 이성에서 발견하였고, 피히테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당위에 기초를 둔 체계를 만들었으며, 셸링은 이 체계를 우주에 확장시켰고, 헤겔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완성하였다. (J : 즉 이런 식의 연결인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 -> 피히테의 당위 -> 셸링의 우주의 체계 -> 헤겔의 보편적 완성) 칸트의 정립에 대하여 반정립이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며, 이 반정립은 또한 정립에 대한 필연적 보완이다. 그리고 헤겔에서 이 보완을 통해 칸트의 정립은 "전체"로 됨으로써 비로소 "진리"가 된다. 비판의 명제들은 형식상으로 부정적 명제들이나, 이 부정의 의미는 폐기가 아니고, 어떤 긍정적인 것으로의 전진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 부정이 긍정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곧 "부정적인 것의 힘"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부정을 시인했지만,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의 힘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헤겔은 이 힘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한다.

 

헤겔의 철학은 끝까지 밀고 나아간 스피노자주의다

헤겔의 사상은 그의 선행자들의 사상과 그다지 친밀한 편은 아니다. 그의 '새로움'은 스피노자의 그것보다 더하다. (J : 스피노자도 기존 형이상학에 비해 굉장히 신선하기 때문) 두 사람 모두 통일적인 실체, 범신론, 엄격한 체계형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꽤 날카롭게 판단한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에 생명이 없다고 본다. 스피노자의 실체에서 어떤 것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피히테와 헤겔 모두 스피노자가 "신을 죽였다"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자연과 정신에 관한 속성 이론의 긍정적인 점은 헤겔에게서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헤겔의 속성 이론은 좀 다르다. 그의 속성 이론은 절대자의 파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훨씬 더 내면적인 관계 속에 지양되어 있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전개한 절대자의 범주들에 관한 설명은, 일종의 "신의 속성과 양태의 기하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헤겔의 이 기하학은 수학적 필연성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스피노자가 의욕 했던 바를 실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철학은 끝까지 논리 정연하게 밀고 나아간 스피노자주의로 간주된다.

 

라이프니츠와 헤겔

라이프니츠이 사유는 헤겔의 사유와 깊게 연관돼 있다. 하지만 그 관계가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헤겔은 '단자'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자'가 가진 내용들은 헤겔에게서 살아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세계 속 형상들의 단계 영역과 통일성
2. 세계 속 형상들이 표상 작용을 통해서 세계 전체에로 내면적으로 참여함, 그리고 여기로부터 보다 더 높든 단계에서 자기파악 (헤겔에게서는 "자기 내 반성")을 통하여 '의식'이 생성
3. 인식의 순수한 선천주의
4. 자기의 규정을 내면적인 것으로서 자신 속에 지니고 있음. 즉, 자기의 규정은 전개됨으로써만 바깥으로 표현됨.
위와 같은 점은 매우 정당하게 헤겔을 라이프니츠주의 철학자로서 간주하게 한다. 그러나 헤겔 철학과의 큰 차이점도 있다. 라이프니츠의 보편과학(scientia generalis)는 존재론적 범주들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이 범주들의 관계, 종합, 파악을 제 법칙으로부터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외면적인 것으로 머물고 말며, 본질적으로 결합술의 도식 저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다. 즉 여기서 사태의 본래적 의미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사태의 본래적 의미는 외적 측면(결합술)의 배후에서 일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성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이와 같은 법칙성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원리들의 전체 영역에 대해서 이 법칙성이 실현되어 있다. 결합술은 살아 있는 흐름으로, 즉 범주들의 자기 운동으로 지양되어 있다. 결합술은 더 이상 사후에 추가되는 결부가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짜 맞추어진 상태이며, 동시에 짜 맞춤 그 자체의 역학이다. 결합술은 유한한 오성에 있어서는 범주들의 외적인 현상 형식으로 머문다. 라이프니츠가 이념의 총체를 "신의 오성"이라고 불렀다면, 헤겔의 논리학은 바로 이 "신의 오성의 사유" 이다. 헤겔은 다면성, 수용력 및 이용력에 있어서 가장 내면적으로 라이프니츠를 닮았다. 그러나 보편성에 있어서는 다르다. 라이프니츠는 다양한 역사적 요소들을 통일시키기는 하였지만, 결코 그 전부를 한 점으로 수렴할 수는 없었다. 헤겔의 사유 속에서는 이 요소들이 한 점으로 수렴한다. 헤겔의 논리학은 합리적 존재론이고, 현실적으로 총괄적 보편과학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제일철학(philosophia prima)이다.

 

유명론과 실재론의 종합으로서의 헤겔

우리는 헤겔의 철학 속에 전성기의 스콜라주의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개념 실재론'의 경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개념 실재론의 기본 전제는 사유의 개념 속에 사물의 본질이 직접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또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식의 실체와 개념의 실질이 서로 사실상 일치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결과적으로 '논리적으로 형성된 개념적 인식'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정초하는 일은 극단적인 귀결에 이른다. 그의 존재론은 철두철미하게 논리학 속으로 수용되었고, 동시에 개념 전개의 변증법적 진행은 세계 전개의 실제적 진행이 된 것이다. 스콜라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철학사에서 알려져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대담한 개념 실재론인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게는 유명론적 입장도 유지되고 있다. (유명론 :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는 실재론과 대립하여,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개개의 사물이며 보편이란 단지 '개개 사물의 배후'에 그것들에 공통되는 명사로서 붙여진 일반적인 기호나 이름(라틴어 nomina)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추상물이라고 하는 입장. 실재론과 유명론의 이러한 대립은 '보편 논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실재론에 대항한 유명론의 대두는 가톨릭 교회의 스콜라 철학의 권위에 도전한 합리적 기성, 즉 경험적 제 과학을 육성한 사조(思潮)의 승리를 예고하면서 스콜라 철학의 붕괴를 촉진하였다) 헤겔에 의하면 철학적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단지 "낱말"일 뿐인 '이차적 개념'도 있다. 그것은 "논쟁적인 사유"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추상적", 고정적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들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모두가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반면 그에게 있어 사변적 사유는 비로소 유동하고 또 결코 술어 속에 고정되지 않는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 가동적인 개념이 비로소 사태와 일치하게 되고, 그리하여 사태의 본질이 된다. 따라서 정리하자면, 헤겔에게서는 유명론과 실재론의 종합이 현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플라톤과 헤겔

헤겔은 플라톤에게서 자기의 모범을 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를 맨 먼저 읽은 근대의 독자로서 이 어려운 대화편에서 자기의 내밀의 뜻을 획득하고 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우리는 헤겔 철학에서의 "즉자 존재자"의 원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플라톤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1. "항상적 존재자", "비감각적인 것"(초감각적인 것), "영혼"이 자기 자신의 깊은 곳을 직관할 때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하는 것으로서, 다만 정신적 직관에만 주어진 것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 속에서 결정된 것이 아닌 것
3. 영혼에 의해서 정립된 것이 아닌 것
4. 사유 혹은 직관과 함께 존재하기도 하고 몰락하기도 하는 "사상" 또는 단순한 "사유 대상"이 아닌 것으로서, 모든 실재적인 것의 "원형"인 것
5. 그 자체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나, 초실재적인 것 속에 있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예로부터 실재적인 것도, 사상도 아닌 제3자, 즉 "즉자 존재자"를 이해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철학적" 감각을 시험하는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는 실재적 세계와 사상의 세계를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두 세계의 본질이 폐쇄된 채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기질이 같은 사람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같은 기질의 사람은 헤겔일 것이다. 헤겔의 논리학에서 "본질론"은 전체 속에서 직관된 것, 그리고 내용상으로는 완성된 이념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사이에는 어떤 보완의 관계가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가까이 있는 헤겔이 그 열쇠가 되고, 헤겔의 사변적 높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직접적 소여에서 출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통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귀납은 어디까지나 사태의 본질에로의 "인도"일 뿐이다. 이 본질은 여기에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본질은 "형상", 즉 보편자이다. 그리고 개별적인 경우가 보편자에로 "인도될" 수 있는 이유는 개별적인 경우가 보편자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 놓여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대자적으로" 존립하는 어떠한 보편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개별자가 있고 보편자가 있지, 보편자가 사물보다 먼저 있지는 않다. 보편자는 본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사물"의 보편자이다. 보편자를 고립시켜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유는 추상이다. 마찬가지로 헤겔의 명제는 엄밀히 말해 다음과 같다. 헤겔에게서 추상적 보편자는 "참된 보편자"가 아니다. 참된 보편자는 언제나 "구체적인 것" 이다.

두 사상가의 본질상의 깊은 유사성은 그들의 방법에 있다. 얼핏 보면 난제론(Aporetik)과 변증법은 별로 닮은 것 같지 않다. 난제론은 구속력이 없고, 의식적으로 잠정적인 반면, 변증법은 결정적인 것, 종국적인 것, 지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유는 문제 자체의 전개에서 동일하며, 어떠한 심연 앞에서도 멈추지 아니하고, 난점, 부조화, 모순을 고려하지 않고 폭로한다는 점 (말하자면 이론 및 체계에 대해서 고려함 없이) 에서 동일하다. 이처럼 사태에 순수하게 몰두한 경우는 인류의 역사에 단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요, 나머지 하나는 헤겔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그 모든 조치에 있어서 모순에로 나아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난문론 역시 모든 근본 문제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그렇다. 특히 운동, 영혼, 형상, 현세태, 개별물, 신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하는 데 있어 난문의 해결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난문 자체에 대해서는 주의하지를 못했다.

그 밖에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상의 원리가 변증법의 모든 구조를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이 최상의 원리라는 것은, 문제 속에 폭로되어 있는 모순을 인수하고, 그것을 약화시키지도, 제거하지도 않은 상태로 사태의 본질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원리는 결코 모순의 해결은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히 모순되는 것의 종합이다. 즉 이것이야말로 사변적, 변증법적 해결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운동은, 가능한 것이 단순히 가능한 "한에서" 완성인 것이고, 미완성적인 것이 단순히 완성되어 있지 않은 "한에서" 의 완성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생명의 원리로서의 영혼은 유기체의 "최초의 원현태"이다. 이 원현태는 완성이고 현실화이지만, "최초의 원현태"로서 바로 완성과 현실화 '앞에' 존립한다. (J : 즉 완성이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다는 점에서 헤겔과 닮았다) 그에게 형상은 사물 형식의 원리이다. 그러나 보다 더 보편적인 유가 형상 속에 전제되어 있다. 형상은 원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현세태는 가능적인 것(잠세태)의 현실화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세태에 '앞서는' 현세태의 선재성을 가르치고 있다. 개별물은 형상과 질료로 된 "구체적인 것"이다. 그런데 형상의 규정성은 질료의 특수한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과 그것의 반대와의 통일이다. (J : 형상과 질료의 통일이라는 말?) 결국 신성(神性)은 "부동의 원동자"이고, 동시에 사유하는 자와 사유된 자의 동일성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유된 존재로서의' 사유하는 자기 자신이 '사유하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는 제거되지 않은 모순을 원리의 구조 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그 모순이 그 속에서 본래적인 지배자이고, 또 역시 의식적으로 강조된 자라는 것도 명백하다. 모순되는 것을 종합 속에서 이렇게 타당하게 하고 적극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사실상 해겔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이 방법이 동일하게 이용되고 있고, 또한 그로 인해 동일한 구조를 가진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의 시조이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논리학은 일보도 진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칸트의 말이 정당하다면 헤겔의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의 최초의 진보일 것이다. 후대의 형식주의적 논리학은 존재론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됐다. 이 형식주의적 논리학은, 마치 개념이 최초에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판단을 개념으로부터, 그리고 매한가지로 결론을 판단으로부터 발생시켰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개념은 결론 속에서 처음으로 발생한다. 개념은 결과이지 단초가 아닌 것이다. 모든 징표는 판단의 술어로서 연결 추리로 매개되어 개념에 삽입된다. 어떤 사실의 본질 규정은 그 배후에 긴 계열의 이와 같은 삽입, 전진적 및 하강적인 계열의 종차를 갖고 있다. 결과로서의 형상은 복합적인 것이요 구체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형상은 동시에 사물의 존재 원리요, 형상 실체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헤겔 논리학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개념이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기본 본질성이 개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는 자기의 배경, 즉 본질 속으로 침몰한다. 그러나 본질은 자기의 내적 반성 속에서 개념으로 증명된다. "사태의 실존으로의 나타남"은 형상에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 나타남은 "근거"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고, 그 근거의 "진리"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과 아리슽토텔레스 사이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모든 형상의 상대물로 질료가 존립해 있다. 현실성과 개체화는 이 질료에 기인한다. 헤겔에게서는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질료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에게서 질료는 현실성과 개체화가 아닌 절대자의 범주 속에서 받아들여져 있다. 헤겔에게서 비합리적인 것(질료)을 받아들이는 일은 한 걸음씩 천천히 회귀하는 반립론에서 분명히 알려진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언제나 뒤따르는 "종합" 속에서 표명된다. 종합 속에서는 모순은 해소되어 있지 않고 "지양"되어 있을 뿐이다. 즉 수용되고, 보존되며, 사태의 통일적인 전체 속으로 고양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점이 또 뭐냐면, 개체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비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한층 더 깊이 본질론으로 들어간다면 일련의 동일성의 명제들을 만나게 된다. 헤겔에게는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동일성이 된다. 그것은 최고도의 종합적인 동일성이다. 그리하여 술어는 주어이고, 모순되는 것은 사태의 통일성(사태의 진리)이며, 개념은 존재의 본질이고, 원인은 목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즉자 존재자(내면적 규정)는 대자 존재이며, 역사적 단계는 논리적 단계가 된다. 변화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연속하는 유일한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의 연결의 고리는 각기 대립, 모순의 폭을 포함하지만 마지막 고리 속에서 다시 단초에로 돌아와서 그 원환이 종결된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다양성은 동일한 절대자의 내면적인 형식의 풍요로움일 뿐'이라고 하는 기본 명제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점, 즉 동일한 근본 존재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지가지의 문제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이 한 점으로 수렴되어서 동일성에 이른다. 거기서 사유된, 정의 내려진 개념으로서의 로고스는 "형상"(본질 규정)과 동일시되고, 형상은 형상 실체와, 형상 실체는 순수한 현세태와, 순수 현세태는 운동의 원인(동적 원인)과, 운동의 원인은 "목적"(완성)에, 목적은 결국 "누스"(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와 동일시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이 연쇄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 원환으로 종결된다는 것이다. 이 연쇄가 "로고스" 속에서 함께 시작하게 되는 사유는 근본적으로 절대적 "누스" 속에서 파악되는 동일한 사유이다. "로고스"의 법칙성을 서술하는 분석론(논리학)은 인간적 – 유한적 사유의 분석론이다. 그러나 이 인간적 사유는 나중에 자기 고유의 대상인 절대적 사유의 현상 형식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또한 사실 이미 분석론에서 사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연쇄는 이미 최초의 고리 속에 최후의 고리가 언표할 것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에서 논리적 법칙성이 "본재자로서의 존재자"의 형식의 법칙성, 즉 존재론적 법칙성으로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J : 즉 "로고스"가 결국은 연쇄를 따라 "누스"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뜻인 듯)

우리가 이 동일성의 연쇄에서 질료가 바깥에 머물고 있음을 도외시한다면, 헤겔의 형이상학의 근본사상은 사실상 이 동일성의 연쇄 속에서 미리 형성된 것이고, 그리하여 헤겔은 완성된, 아니 완성되어 가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간주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헤겔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과정의 목적론은 부분 현상일 뿐이다. 이 과정의 목적론 배후에는 보다 낮은 모든 형상이 보다 높은 형상으로 향하는 경향이 통일적인 전체로서 존재하고 있는데, 실로 언제나 보다 낮은 형상은 그 자신 속에서 완성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고, 보다 높은 형상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보다 낮은 형상이 완성되는 것은 "특수한 질료"를 형상화된 "구체적인 것", 즉 "자연적인 물체" 속에서 가질 때다. 여기서 다시 자연적 물체는 자기의 완성을 유기체 속에서, 유기체는 영혼을 가진 생물 속에서, 생물은 "정치적 생물" (인간) 속에서, 인간은 행복 (인륜성) 속에서, 행복은 정신적 직관 (노에시스) 속에서, 노에시스는 "누스"의 자기 자신의 파악 속에서 갖는다. 이 최후의 것은 신적인 누스 속에서의 순수한 "삶" 및 "최고의 축복"으로서 찬미된다. 존재하는 만물은 이 점을 향하여 상승하는 경향을 자신 속에 갖고 있다. 형상의 목적론은 이 경향이 나아가는 길이다.

헤겔도 이와 마찬가지다. 헤겔에서는 동일한 목적론이 변증법의 진행을 보다 낮은 것으로부터 보다 높은 것으로, '진리는 전체이다' 라는 원리에 따라서 안내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보다 낮은 것은 그 자신에 있어서는 반쪽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 진리를 자기 바깥에, 자기 위에 갖고 있고,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그 다음번의 보다 높은 구조물 속에서 비로소 갖는다. 존재는 그것의 진리를 본질 속에, 본질은 개념 속에, 개념은 "이념" 속에, 또 자연적인 것은 유기적인 것 속에, 유기적인 것은 의식 속에서 갖는다. 이렇게 계속하여 지, 인식, 공동체, 도덕성, 국가, 역사, 예술, 종교, 철학에 이른다. 헤겔도 역시 이 단계의 진행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고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의 운동자", 즉 신을 생각했다면, 헤겔은 철학적 자기의식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동일한 것, 하나의 절대자, 즉 이성을 생각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 절대자를 만물의 단초에 전개되지 않은 채 기저에 놓여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종말에 가서 자신을 실현해 있는 그대로의 절대자를 생각한다. 철학은 바로 영원한 정신이 자신을 완성시키는 우리 마음 속의 자기의식인 것이다.

 

형상의 목적론과 과정의 목적론의 구별

형상의 목적론과 달리 과정의 목적론에서는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목적에의 상승, 즉 단계 계열이 겨냥되고 있다. 상승은 "세계"이다. 단계들은 보다 높은 상태에로 들어갈 때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가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 총체성 속에 보존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연쇄의 마지막 부분을 단계의 진행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부분 속에서 전체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은 단계들을 자기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갖고 있다. 그것은 그 자체 전체에로 마무리된 "과정"의 형상들이 그득 찬 상태인 것이다. 즉 목적은 연쇄이 마지막 부분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다. 목적은 과정을 자신의 속에서도 또 자신의 바깥에서도 가지지만, 그러나 과정은 목적 속에 지양되어 있기도 하고 지양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 과정은 사라졌으면서, 그러나 여전히 손상입지 않은 채로 존재하고 있다. (J : A단계에서 B단계로 나아갔을 경우, A 단계는 완료되었다는 의미에서 '지양'되어 있으나, B단계가 그 자체 안에 A단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지양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