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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188

킥애스의 감동 자녀를 구출하거나, 혹은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의 모티프에는 어딘가 가슴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데가 있다. 채플린의 작품 중 내가 유일하게 눈물을 흘렸던 작품이 였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에서 루크가 스승인 오비완의 죽음을 마주하는 장면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이상한 건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테마에서는 그런 깊은 감동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어떤 '이상화되고 열망된'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오는 정취 때문일까? 가령 나는 작품 속의 아들에 동일시하는 과정 중에, 나의 무의식이 갈망하던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면서 감동을 느끼게 된 것일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감동을 느꼈다는 것이.. 2020. 8. 21.
스마트폰이라는 사물 면담을 하던 소년 A는 스마트폰 중독에 빠져있다. 여기서 치료자는 두 가지 전략을 취할 수 있다. 첫째는 스마트폰이라는 사물을, 그 대상을 다른 어떤 것의 '치환'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가령 스마트폰은 확장된 자기(self)의 일부일 수도 있고, 아버지라는 내적 대상을 사물에 치환한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매개'로 삼아 그러한 매개의 배경에서 작동하는 인간관계의 역동을 분석하는 것이다. 가령 치료자는 스마트폰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소년과 어머니의 갈등 속에서, 소년과 아버지의 갈등으로까지, 그리고 나아가 오이디푸스적인 갈등이라는 무의식의 테마로까지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스마트폰이라는 사물 자체의 존재성 자체에 다다르지 .. 2020. 8. 21.
꼬마 한스의 '말' 프로이트의 는 수도 없이 다루어진 글 중 하나다. 클라인도, 라깡도 모두 이 글에 관심을 보였다. 클라인은 여기서 말에 대한 공포증의 근원에, 사실은 내부에 있었던 공격성이 투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해냈다. 라깡은 말에게서 남근이라는 요소를 보았다. 여기저기서 이 글을 물어 뜯고 소화하고 배설했지만, 그 누구도, '말'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말은 언제나 죽음 충동의 다른 얼굴이거나, 상징적인 남근적 요소의 바꿔치기로서만 간주되었던 것이다. 동물은 언제나 인간화되고, 오직 인간의 세계라는 틀 안에서만 '말'로서 존재할 뿐, '말 자체로서의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2020. 8. 21.
기억의 경로 주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동일한 사태를 서로 다른 '경로'들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가령 A 선생은 삽화적 기억이 굉장히 좋아서, 이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어떤 시기에, 어떤 장면 속에서 이루어졌었는지 기억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B 선생은 유독 시간을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시기가 아침인지 저녁인지, 평일인지 휴일이었는지, 해질녘의 빛이 어슴츠레 비칠 때의 시점이었는지를 기준으로 그 사건을 기억하는 듯 했다. C 선생은 공간에 대한 지각이 뛰어났는데, 당시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공간적인 구성 속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했다. 사태를 항상 개념적으로 따지려는 습관을 가진 나는, 당시 우리가 나눈 대화가 부정(negation)의 과정을 거쳐 어.. 2020.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