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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사적인 정리

[일기] 2013년 12월 20일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3. 12. 20.

요즘 통 공부가 잘 되지 않더니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집중이 잘 됐다. 집중이 잘 된 날은 집에 돌아오는 길이 즐겁다. 집중이 잘 된 날은 의료원에서 나오는 길이 즐겁다. 발걸음이 가볍다. 집에 가서도 편히 잘 수가 있다. 휘파람이 나온다. 오늘도 그랬다. 게다가 의료원 문 밖을 나서니 눈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많이 온다면야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 처럼 이렇게 얄팍한 눈싸라기들이 하늘하늘 내려오는 것은 좋다. 이번 눈은 잘 쌓이는 눈인지, 얼마 내리지도 않았는 데 이미 바닥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

 

의료원에서 관사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약 15~20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조그만 스쿠터를 하나 장만했다. 그걸 타고 아침 9시까지 출근을 했다가, 밤 11시즘이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은 조금 더 욕심을 내서 12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왔다. 의료원에서 집으로 향하는 도로는 매우 적막하다. 12시즘 되면 사람의 흔적이 없어지고, 가로등 몇 개만이 도로를 비춘다. 나는 그 거리를 달리는 것을 은근히 즐긴다. 하루를 알차게 마친 뒤 사람이 없는 텅 빈 도로를 달리는 것은 생각보다 즐겁다.

 

하지만 겨울에 스쿠터를 타는 것은 살짝 미친 짓이다. 지독히도 춥다. 모든 보호장구로 온 몸을 다 가려도, 조그만 틈새라도 있으면 매서운 시골 밤공기가 새어들어와 얼굴을 때린다. 얼굴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거리를 돌파해 집으로 돌아온다. 평균 약 3분정도 걸린다.

 

그런데 오늘은 눈도 오고 해서, 미끄러울지 몰라 천천히 달렸다. 천천히 달리니 눈이 내리는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라이트로 도로를 비추며 달리고 있는데, 도로 위에서 눈알갱이들이 오로라처럼 하늘하늘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 위로 바람이 부니 아직 채 얼어붙지 않은 눈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물결같기도 하고, 살아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사막에 부는 모래바람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나 혼자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퍽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더더욱 줄였다. 결국 집에 오는 데 까지는 십분 정도가 걸렸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정리하는 어린왕자. 나는 이 부분을 퍽이나 좋아한다.

 

 

 

누군가 나에게 "어린왕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어디였느냐?"라고 물었을 때, 만약 아직 고등학생이었다면, 나는 B-612를 발견한 터키 천문학자에 대한 부분을 언급했을 것이다. 내가 대학생 때 남긴 글을 보니, 그 때도 저 부분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은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단지 연장된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어린왕자를 읽어본 적이 없기에. 간혹 길들여지고 싶어하는 여우에 대한 부분도 기억나긴 했다. 하지만 장미에 대한 부분은 결코 기억해낸 적이 없다. 그만큼 그 부분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요즘 불어를 공부하기 위해 어린왕자를 다시 읽어보니, 요상스럽게도 장미가 나오는 부분에서, 마치 닻이 걸린 것 처럼, 마음이 철컥 하고 걸려들었다. 장미가 나오는 부분은 8,9장인데, 이 챕터에 이르자마자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내용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것이다. 심지어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딱히 내가 겪은 특정 사건의 은유로서 이 일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왜 그런지 몰라도, 장미가 하는 말들과, 그에 대한 어린왕자의 반응들이, 너무나도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장미는 말한다. "난 너를 좋아해. 하지만 넌 그걸 전혀 몰랐지. 내 잘못이었어." 그리고는 덧붙인다. 어물쩡거리지 말라고. 짜증난다고. 가기로 결심했으니 어서 가라고. 그리고 먼 훗날 멀리 떨어진 지구 위에서 어린왕자는 말했던 것이다. "그 어줍은 꾀 뒤에는 애정이 숨어 있다는걸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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