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호르몬의 노예지 이게 뭐야" 아내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평소 아내는 흔히들 말하는 월경전 증후군이 심했다. 그날이 왔다는 것을 내가 더 빨리 알아차릴 정도였으니까. 어딘가 좀 날카롭다 싶으면 일주일 뒤 어김없이 그날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랬던 아내가 이제 임신을 했으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나. 요동치는 호르몬에 맞추어 아내의 상태도 하늘과 땅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평소라면 농담으로 받아칠 말에 갑자기 발끈하는가 하면 갑자기 나에게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한다.
나는 직업정신을 발휘해 우울해하는 아내를 위로해주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호르몬의 노예라는 표현은 적절한 것일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의 정신의학은 인간 정신의 상당한 부분이 생물학적인 것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성격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적인 믿음까지도 말이다.
얼마 전엔 그런 일도 있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난데없이 딸기가 먹고 싶단다. 나는 곧바로 근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로 달려가 딸기 한 박스를 샀다. 사는 김에 내 간식도 몇개 샀다. 사놓고 나니 꽤나 봉지가 무거웠다. 나는 양 손 한 가득 먹을 것을 사들고는 어이구 추워를 연발하며 집 앞 돌 계단을 올라왔다. 엉거주춤 어깨를 웅크린 자세를 하고서 말이다.
그런데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서도 내 입은 웃고 있었다. 이게 뭐람. 나의 모습이 퍽이나 우스꽝스러웠다. 이거 뭔가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영화에서 봤을까? 드라마였을까? 갑자기 또 나의 뇌가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장면을 겹쳐보던 내 머리 속에 갑자기 전구가 반짝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내 모습이 마치 고기 가죽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원시인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드라마나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남아있던 선조의 모습이 겹쳐졌던 것이다.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느껴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 돌계단 위에서, 내가 본능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잠깐 알아차렸던 것 같다. 이성과 생각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수 만년 동안 반복되어온 어떤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만 같다. 그게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이어서 나로서는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아내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느낌이 나로서는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 본능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길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 받아들임이야말로 참된 자유는 아닌가 하는 스피노자적인 생각을 잠시 해보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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